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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해지고 싶으세요?    
글쓴이 : 공인영    12-05-31 14:31    조회 : 3,761
겸손해지고 싶으세요?
 
 

 
  황토 물을 들인 속옷이 눈에 띄기에 피부가 여린 남편을 위해 두어 개 사고 돌아서는데 주인이 나지막이 불러 세운다. 의아해 하는 내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며 양해를 구하고는 오후 햇살과 바람에 다소 피곤해진 눈을 크게 벌려 얼굴 바싹 들이밀고 자세히도 들여다본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그러더니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지금 몸 상태가 편안하지 않은 걸 딱 짚어낸다. 사실 얼마 전부터 자꾸 등줄기로 열이 올라오는 게 그저 긴 감기몸살의 후유증이려니 생각하던 차다.
  눈동자가 많이 탁해 있다며 몸의 기운도 부족하지만 그보다는 짜거나 기름진 음식 탓이 더 클 거라고 했다. 둘 중에 하나를 다시 묻길래 간간한 음식 쪽에 손을 드니 그래도 그게 좀 다행이라던가. 나는 간이 진한 음식을 좋아한다. 물론 소태가 아닌, 얼큰하고 짭조름한 것을 즐긴다는 건데 이젠 그것도 크게 줄여야 한단다.
  물도 많이 마시라고 했다. 그야 요즘 누구나 서로 나누는 건강 인사가 아닌가. 하루에 적어도 페트병 작은 것으로 두 개 정도는 마셔야 한다는데 물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그만큼은 또 얼마나 벅찬 양일까 생각하는 것부터가 벅차다.
  그러면서 머리를 빗어주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하면 믿겠냐고 느닷없이 묻는다. 끄덕끄덕. 사실 약에 의지하고 영양제 따위를 선호하지도 않거니와 병원에 매달리는 사람도 아니지만 조상의 지혜로 쌓인 비방과 비법들엔 은근히 공감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근거가 보이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빗질은 왠지 그런 쪽에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순수하단다. 아, 그러면야 얼마나 좋을까.
  바라보던 주인의 눈이 오히려 참 맑다. 옆으로 미루어 놓은 책을 힐끔 훔쳐보니 눈동자에 관한 사진들이 가득하다. 아마도 눈에 관해 공부하는 듯싶다. 장사하는 이의 말을 다 믿다 보면 주머니에 남아나는 게 없을 터, 그래도 왠지 그 말과 태도엔 신뢰가 있어 보인다. 요즘 조금씩 몸의 이상을 느끼던 차라 기대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찰을 다 돌고도 떠나는 마음이 괜히 아쉬워 잠깐 들어선 가게가 뜻밖에 발목을 꽉 잡는다. 기념품 가게라 대부분 그저 그런 물건 일색이거니 했는데 뜻밖에 눈길을 끄는 게 있다. 보는 순간 마음이 쏠린 반달 모양의 얼레빗이 그것이다.
  얼레빗은 살이 촘촘한 참빗과는 다르게 그 간격이 성근 빗이다. 진열대 아래  놓인 모양들을 보자니 그 독특한 디자인들이 예사롭지 않고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는 분명 전문가의 솜씨였다. 이걸 누가 만들었을까.
  몇 가지 보여주길래 만지작거리며 쌈직한 걸 찾던 중에 눈에 쏙 들어온 건 바로 '겸손할 겸(謙)'자가 씌어진 반달 모양의 빗이었다. 그걸 사겠다는 말과 동시에 주인도 특히 좋아해 자주 새겨 넣는 글자라는 말이 겹쳐졌다. 오호, 우린 가볍게 웃었다.
  알고 보니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인 낙죽장 을산 김 기찬 선생이며 가게 안의 저 많은 빗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젊어 보이는 분이 벌써 장인이라니. 어리석은 의구심이 한 가닥 들었지만 이내, 안쪽에서 지나쳐 온  작품 하나 다시 돌아보며 기꺼이 그렇겠구나 싶어졌다.
  그것은 놀랍게도 그의 어머님의 흰 머리카락 다발로 만들었다는 커다란 붓이었다. 상징적인 가치를 담아 유리 액자에 보관한 작품에서 왠지 시리고 뭉클한 기운을 느꼈는데. 어머니를 깊이 품은 저런 마음이라면 장인의 경지로 오를 큰 각오와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내게 장사나 하려던 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단아한 자태의 여인이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그림들은 늘 고운 상상을 불러온다. 어느 새 나도 그 시절 여인이 되어 고운 한복의 맵시를 다듬으며 머리카락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정갈하게 빗는다. 그러면 어여쁜 임이 가만히 오시어 그윽한 미소로 품어준다는, 참 얄궂지만 그런 풍경을 그림처럼 가끔 그린다. 연속극을 너무 많이 봤나. 그러면 어떠랴. 좋기만 한 걸.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시간엔 누구 한 사람 붙잡고 좋은 말 건네줄 겨를도 없단다. 운이 아주 좋았다고 말하던 그의 미소를 떠올리며 묶었던 머리 끈을 푼다. 심심할 때마다 빗으라고 했다. 연속극 볼 시간도 그저 손놓고 있지 말라며 늘 피곤한 발바닥의 굴곡 진 부분도 꾹꾹 눌러주고 목 뒤에서 머리로 거슬러 빗어 올리기도 하란다.
  아무튼 그런 저런 연유로 내게 예쁜 얼레빗 하나가 생겼다. 인증서까지 첨부된, 살구나무로 만든 저 빗. 한 면엔 '謙'자가, 다른 한 면엔 그의 일터인 '금죽헌(金竹軒)'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머리를 빗는 행위에도 무언가 수행의 느낌이 있다. 반복되는 빗질 속에 찌꺼기처럼 쓸려나올 게 있을 것 같다. 나날이 거세지는 중년의 수다쟁이 아낙이 아니라 그 옛날 창포물에 머리 감고 바람에 살랑 살랑 말리던 여인. 다소곳이 앉아 곱게 빗질하던 그 여인의 마음 흉내라도 이제 한번 내볼 꺼나.
  그러고 보니 모처럼 여행길에 비우고 오겠다던 마음 뒤로, 비우면 다시 채워야지 무슨 소리냐던 욕심 하나가 그만 쭐레쭐레 송광사까지 따라붙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좋으냐. 꾹꾹 눌러 건강해지고 쓱쓱 빗어 겸손해질 얼레빗이 생겼는데.


                                                                                        범우사 < 책과 인생 20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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