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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씩 우릴 깨무는 것은    
글쓴이 : 유시경    12-10-16 00:12    조회 : 5,202
조금씩 우릴 깨무는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식사를 하던 동남아 청년들의 걸음이 뜸하다. 불경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것이 어디 식당만의 일일까. 공장들도 속속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고 이열 종대로 늘어선 택시기사들의 하루는 늘 불투명하다. 가까운 곳에 사는 지인 하나는 서른 명이 넘는 직원들의 월급 때문에 일주일간을 미친 듯 울면서 돌아다녔다고 했다. 여러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는 ‘비즈니스’라는 화려한 수식을 가진 경영이란 얼마나 구차하며 치열한 것인가. 그녀는 남편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다면서 어쩔 수 없이 낼모레도 “공을 치러” 나가야 한다며 웃었다. 호호, 세상 참 시니컬하기도 하지.
 이 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구애는 눈물겹다. 스리랑카에 어린 두 아내를 두고 온 ‘샤이니(Shiny)’란 남자는 틈만 있으면 우리 가게로 찾아와 눈을 맞춘다. 사랑스럽고 앳되기 그지없는 두 번째 아내 사진을 보여주면서 “큰 마누라가 많이 아파서 둘째 마누라를 얻었어요. 그 일이 잘 안 되거든요. 둘이 사이좋게 잘 지내요.”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웃는다. 그게 뭐가 신기하다고. 한번은 제 나라 토속음식이라며 노란 커리 볶음밥을 만들어오기도 했었다. 우리 식구는 그 호의에 맛있게 먹어주는 척하다가 그가 떠나자 그만 숟가락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들러 늦저녁을 먹는 자칭 치과의사 출신의 필리핀 청년은 서투른 한국말을 곧잘 건넨다. “휴가 안 가요?” “가고 싶은데 못 가.” “나랑 같이 가면 되지요.” “어디로?” “세부 가봤어요? 거기 너어므너므 좋아요.” “그러게, 정말 멋질 것 같은데 저기 내 남편이 안 보내줄 것 같아. 어쩌지?” “아저씨 혼자 집 보라고 그래요.”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언어 구사력.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아들뻘 되는 베트남 청년은 더욱 저돌적이고 즉흥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구애를 펼친다. 그는 언제나 친구를 예닐곱이나 몰고 들어와 한정 없이 술을 마신다. 좌석에는 늘씬한 아가씨 두어 명이 노상 끼어있다. 소주를 병째 들이키다가 대화가 어긋났는지 술병을 돌려 쥐더니 순식간에 상대를 위협한다.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들이 놀란 척도 안 한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가 보다. 성깔 있는 그가 술을 갖다 주는 내게 말을 붙인다. “아줌마 몇 살이에요?” “낼모레면 오십.” “난 서른인데, 오십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단 말인지. “집 있어요? 집? 으음, 아주 작은 거 하나. 나 집 있어요. 돈도 잘 벌어요.” 그는 벗들과 술을 마시며 틈틈이 질문을 하다가 혼자서 대답하기도 한다.
 식당 여자가 길거리 여자나 공장 동료보다 만만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타국의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어찌 어렵지 않는 일이랴. 내겐 두 딸이 있고 남편도 있으며 이제 반백(半百)을 향해 달려가니 더 이상 그런 작업 걸지 말라 해도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여간 괴롭지가 않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끝끝내 말장난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한창 좋을 나이인데, 나 서른 살은 안 괜찮아. 이제 힘이 달리거든.
 오 년 전,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동네에 물밀듯 들어오면서 나는 한 일 년간 동네 어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한국어에 서툰 이방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모종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고 무섭게 이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해나갔다. 처음엔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는 듯 하다가도 몇 주, 혹은 몇 달 만에 우리의 모든 걸 섭렵한 것처럼 느껴졌다.
 1990년대에 ≪리얼리티 바이츠(Reality Bites)≫ 라는 미국영화가 있었다. ‘청춘 스케치’라는 번역으로 한국에 선보였을 것이다. 어학원 강사는 이 ‘바이트(bite)’가 무슨 뜻인지 말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현실이 우릴 아프게 조금씩 깨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삶의 단편, 즉 잘게 부순 종잇조각 같은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강사가 종이를 입에 넣고 씹는 동작을 취하는 것이었다.
 꿈의 천국인 미국이란 나라에서조차 그것은 좀도둑처럼 젊은이들을 수시로 괴롭히나 보았다. 영화 속에서 실직한 레이나에게 트로이는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담배, 한 잔의 커피, 너와 나의 대화, 그리고 오 달러” 라고. 그러나 젊음은 부드러운 대화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더라. 현실은 절박한 외국 노동자들의 내일과 미래를 찢어먹는다. 그들은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꿈을 원하고 있다.
 어떻게든 한국여자와 관계를 맺고 결혼을 하면 남부 아시아의 키 작은 청년들은 다시 이 나라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더 훌륭한 로또 당첨이 없는 것이다. 볶음밥을 선사하며 자신의 사업 추진을 꾀하고자 했던 샤이니도 언젠간 두 아내 품으로 돌아가리라. 급박한 삶이 그 순진한 영혼들에 일격을 가하는 것 같아 약간은 씁쓸하기도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반찬 한 가지 더 챙겨주고 애틋한 미소 한 번 더 짓는 일인 것임을.
 고국으로 떠났을까. 염천(炎天)의 낮과 밤, 그들은 더 이상 내 가게에 들르지 않는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광장벤치를 수놓던 올망졸망한 사내들의 구릿빛 정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네 개 나라말을 할 줄 안다는 인디아 청년, 저하고만 살아준다면 한 달 생활비로 월급 중 절반을 떼어주겠다던 그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종종 식당 앞을 오가며 곁눈질하던 쿠르타(kurta)를 입은 저 사내가 어쩜 그는 아니었을까. 꿈의 세계에선 언제나 고등(高等)룸펜(Lumpen)일 수밖에 없는 타국의 어린 왕자들. 사랑은 구원하는 걸까, 구원이 사랑하는 것일까. 그네는 이제 어느 타향으로 찢어진 영혼을 구겨 넣어야 하나. 사랑의 본질에 이르는 길은 진정 어디에 있는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점점 무덤덤해지는 외국인들과의 대화. 2012년의 역전과 산업벨리는 더없이 삭막하다. 아직 내 젊음에 ‘자유’라는 두 글자를 옮겨 적어야 하는 규칙이 남아있다면, 이 도시 외곽에 터전을 마련하고 현재의 삶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여피(yuppie)’를 꿈꾸고 싶건만(그러나 자유란 또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방임을 조장하는 것이던가). 현실이란 배고픈 생쥐가 향긋한 살구비누를 조금씩 갉아먹는 것과 같아서 우린 그것을 조용히 지켜볼 수밖엔 없는 것이다.
 
 - 한국산문 2012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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