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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5월의 멋진 날들    
글쓴이 : 공인영    12-11-04 17:14    조회 : 4,359
어느 5월의 멋진 날들

 
 
   밤새 걸어왔을 꿈 속 여정을 마치고 눈을 뜨는 순간 창틈으로 새어드는 서늘한 공기를 감각하며 ‘아, 살아있음이여!’ 하고 외치고픈 날이 있다. 방문을 열면 부스스한 내 몰골에도 좋다며 납작 엎드린 채 온 밤을 기다려 온 밀키 녀석의 꼬리가 빠질 듯 흔들리는 날이 있다. 그 쌜룩거리는 엉덩이의 리듬을 타고 돋는 삶의 의욕이 날 제일 먼저 미소 짓게 하는 그런 날들이 있다.
   미처 깨어나지 못한 시간들을 툭툭 건드리며 베란다로 나가 닫힌 블라인드를 열어 제친다. 그리고 화초에 물 한 바가지씩 주고 있노라면 아파트 마당까지 당도한 분홍빛 햇살이 벽을 타고 오르는 게 보인다. 그것들이 창턱을 넘고 베란다를 기어 마침내 거실 마룻바닥까지 번져와 누워버릴 때 우리 집에도 드디어 아침이 도착한다.
    이런 날은 온 천지가 하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것만 같다. 눈부신 천연 영양제가 먼 우주로부터 날아와 늘어지던 몸을 기운 나게 하고 눅눅해진 정신도 말려준다. 어디 사람만 사랑하랴. 자연의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튼실하게 해 줄 이, 봄날의 햇볕이 어쩌면 그리도 찬란한지 이런 날 무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궁리를 접었다. 그냥 좀 걷기로 했다.
    요즘은 '걷는 일'이 대세란다. 어디선가 한 순간 점화되더니 이제는 지역마다 특화된 무형의 상품처럼 광고도 넘친다. 제주의 '올레 길’에서 시작된 걷기는 또 다른 길들을 불러내며 지리산도 더듬게 하고 울릉도도 휘돌아 마침내 서울의 복판 북한산에까지 이르고 있다.
    평범한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호기심 가득한 '특별함'으로 시선 받는 일, 21세기 문화적 특징이다. 자고 나면 달라져 있는 세상에서 어제의 관심을 내일까지 지속시키기란 좀 어려운가. 속도를 내지 못하거나 싫증난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게 폐기되고 밀려나니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멈추지 않는 변종으로 파생되며 '더 좋은 것' 과 ‘더 빠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탓이리라.
   그러나 세상이란 어차피 불공평한 동네라서 부와 가난, 비범함과 평범함이 사람들의 욕망과 함께 뒤범벅 돼 사는 곳이니 제 형편껏 행복과 만족의 용량과 수위를 조절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나 어렵단다.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란 개그 유행어에 속내를 읽힌 듯 허탈하면서도 우린 그 속도에 정신없이 떠밀려 가느라 지쳐간다.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개인을 넘은 집단과 사회적 병폐까지 초래한다. 자연과 생명을 함부로 하고 내 이익과 행복을 위해선 남의 불행도 쉽게 외면해 버리는 비정한 사람들이 늘어간다. 사람을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지켜주는 건 내면을 흐르는 어질고 따뜻한 것들인데...
   그런 때 새삼 걷기가 화두다. 뒷방 신세였던 '느림의 미학’도 다시 불려나와 이 정신없는 날들을 충고하고 격려한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신은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세상 속을 홀로 걷게 했다. 많은 운명적 표지를 만나고 그것들을 해석하며 가는 동안 그 멀고 긴 시간을 결코 서두르게 하지 않았다. 예측 못한 어려움과 위기를 만날 때마다 지혜를 간구하며 최선을 다하고, 그런 인간에게 하늘의 섭리와 가호가 관여하는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가.

   가슴 뜨겁게 시작했을 내 인생도 많은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나를 믿고 확신에 찼던 세월 속에도 때론 누군가에, 무언가에 끌려 다녔고 주저앉은 건 셀 수도 없으니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부끄러워질 즈음부터 걷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이제야 산다는 건 생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순응하는 일임을 깨닫는 중이다.
    아파트 후문을 내려와 작은 공터에 붙박인 운동기구로 가볍게 몸을 푼다. 요즘은 군데군데 이런 시설이 놓여 헬스장에서나 보던 걸 무료로 사용하니 주민들도 좋고, 무엇보다 적적한 노인들이 가볍게 운동하며 담소하는 자리가 되니 참 다행하다. 풍경처럼 앉아있는 그들을 보며 미래의 날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안수기도처럼 내려앉는 햇살을 맞으며 걷다 보면 낡은 교회를 두고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찻길을 피해 왼쪽의 허브농원을 끼고 돌아야 텃밭이다. 초입부터 개 짖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이 시침질하듯 푸른 허공에 띄엄띄엄 울려 퍼진다. 가끔은 어느 집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털빛 근사한 닭들의 울음까지 묘목 사이를 부딪치며 기운차게 새 나오기도 한다.
    단정하게 심은 채소와 과실나무가 그림처럼 예쁜 곳에선 잠깐씩 멈춰 구경을 한다. 팡파짐하게 주저앉아 땅을 일구던 아주머니의 벗겨진 등짝을 보며 얼른 가서 옷자락을 내려주고 싶기도 여러 번이다. 볕에 그을린 얼굴로 힐끔 돌아보는 그녀에게, 풍경이 예뻐 사진 몇 장 찍어도 되냐고 묻자 싱겁단 듯 웃으면서도 끄덕여준다. 내친 김에 그쪽으로 사진기를 들이대자 아서라, 손사래를 치며 얼른 모자 속에 얼굴을 감춘다. 부끄럼쟁이!
   사진을 찍으며 그저 몇 마디 주고받은 걸로도 막연히 품던 노후의 전원생활이란 결코 낭만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한다. 꿈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하며 차라리 ‘지금’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뻣뻣하던 관절들도 먹인 풀 빠지듯 말랑말랑해진다. 진즉 친구가 된 나무와 풀들 중에 아는 녀석들 이름을 불러주며 걷는 일은 즐거움 중에도 으뜸이다.
    텃밭을 빠져나와 기찻길 옆을 따라가다가 내친 김에 신호등 몇 개 더 건너보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마두도서관 뒤 야트막한 산까지 가보자꾸나. 높은 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깟 언덕’이겠지만 콧구멍 벌름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쉴 게 분명한 내겐 정발산도 산이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오르다 툭툭 불거진 채로 땅 위를 기는 아름드리나무의 뿌리 앞에 이르면 뭔지 모를 안간힘으로 손끝이 옥죄어든다. 우리 안의 갈등도 때론 저렇게 핏발을 세우려니 싶어 애잔해서 차마 밟지 못하고 비켜선다.
    어디, 걷는다고 마음이 늘 비워질까. 때로는 거미줄처럼 더 많은 감정으로 얽히며 상상까지 불러오는 것을. 그래도 숲에 머물며 나를 쉬게 하고 땅의 기운을 밟다 보면 어느 틈에 진실로 가벼워진 순간과 마주할 때도 있으니 그때 평화가 조용히 차오르는 것이다.
  “이제 됐니? 좀 괜찮아?......”
   뙤약볕 아래 가끔씩 아득해지는 머릿속이래도 그 속에 채워지는 이런 소박한 만족감들이 날 자꾸 걷게 한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단순한 즐거움과 가벼움을 향해, 나 아닌 우리도 조금 더 품을 것 같은 그 작은 여유를 위해 걷는다.
   아쉬움이라면 도시의 길들이 어느 새 콘크리트로 굳어져 흙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걸어도 흙 한 번 밟지 못하는 삭막함이여! 살아있는 걸 죄다 밀어내는 탓에 우린 많은 걸 잃어간다. 숨결 없는 길에선 몸과 마음의 회복도 어림없거늘 도대체 그 많은 흙길이 언제 이렇게 다 사라졌단 말인가.
    등산처럼 격하지 않고도 살짝 기울기만 줄인 편안한 코스가 둘레 혹은 올레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자꾸 새 길을 연다. 걷는다는 건 꽤 믿을만한 '수행'이요 '치유'의 순결한 방법이 분명하다. 이 아날로그적 현상이 사방팔방 번지며 길 위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숨 막히게 하던 것들에 다시 갇혀 떠밀려 다니기는 싫다. 굳이 장비 챙겨가며 먼 길 떠나지 않고도 초여름 햇살로 넘어가는 동네에 눈도 맞춰가며 새삼 어떤 느림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갈 건지 충분히 디자인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걷기 좋은 날은.
 
                                                           
 
                                            <2012. 한국산문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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