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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기차역    
글쓴이 : 공인영    12-11-04 17:24    조회 : 5,015

꿈꾸는 기차역


  홀로 된 시아버님을 모실 방 하나가 더 필요했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팔고도 무리지만 그래도 분양 아파트의 ‘보여주는 집’이란 이유로 몇 푼이나마 더 깎을 수 있어 차라리 고마웠던, 빠듯한 계산에 꿰맞추며 겨우 찾은 집이었다. 서민 아파트 십년 살림 끝에 뜻밖의 신도시에 그것도 삼십 평대로 처음 진입한 아낙의 마음...이사하던 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쳐 거실 바닥에 대자로 쓰러지면서도 실실 웃음만
나왔다.
  몸이 너무 고단해도 잠이 오지 않지만 아마 그날은 온통 새 것에 대한 설렘 때문이 더했으리라. 별 수 없이 도로 일어나 두 딸이 잠든 방을 기웃거릴 때 창밖의 달빛이 캄캄한 내 집 안에다 얼마나 근사하게 축복을 쏟아놓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물질과 행복은 결코 비례하지 않다기에 열심히 산 끝에 얻은 성취마저도 늘 이런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거실에서 주방까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한동안 다리에 알통이 배일 지경이었다. 부엌도 예전 부엌이 아니고 뭐든지 멀찍이 있어 한 걸음으론 어림없게 트인 공간에서,
이상하게 사람도 절로 너그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살림이 차근차근 불어나는 만큼 야금야금 줄어드는 것도 있으니 그게 인생살이인 줄 그때는 다 몰랐다. 설레던 것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여유로워진 틈으로 미세한 금들이 돋아났다. 남편은 조직 속에 더욱 갇히고 아이들은 관리도 쉽지 않게 쑥쑥 크며
달아나니 문득 주부와 엄마 외에 ‘나’ 라는 존재감이 흐려지고 어떤 날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외로움도 커지면 병이라기에 서둘러 약도 먹고 파스 한 장 붙여보지만 그저 잠깐일 뿐, 오히려 관계에 굶주리고 본질에서 멀어진다 싶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사랑이란, 그저 가끔씩 칭얼대는 아이에게 달래듯 쥐어주는 막대사탕이 아닌 것을...
  집안일은 의무감으로 변하고 종일 집에만 계신 시아버지의 눈길을 등 뒤로 받아넘기며 그렇게  긴장과 무력감으로 지쳐갈 즈음 눈에 띈 게 기차역이었다. 근처 백석과 마두의 한자씩을 따서 지은 ‘백마(白馬)’역으로 산책길에 한 번 두 번 마주치다가 그만 단골이 되어버린 곳. 가끔 내 몸에서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었다.

  때로 낯선 곳에 홀로 머무는 일은 구원이다.
‘한번 떠나봐’ 하고 말해준들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그래도 어김없이 떠나는 기차의 단호함이 부럽고 그래서 잠시라도 함께 가는 상상에 흔들리고 싶을 때면 찾아가던,
그 행위만으로도 숨통 트이던 곳이 바로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은 어린 시절부터 달려온 내 삶의 간이역이다. 때로는 국경을 허물며 광활한 초원을 달려보고 싶은 내 의지의 발원지다. 누구나 한번쯤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미지의 세계로 떠날 꿈도 꿀 것이다. 사막과 바다를 건너 운명 같은 일들과도 부딪히며 오지의 하늘 아래 누워
무수한 별들이 주는 생의 의미를 손 안에 받아들고 싶던 순간이 나라고 왜 없을까.
  위대한 예술가와 문학가의 묘비 앞에선 슬쩍 그 무덤을 파헤쳐 창조적인 유전자를 한 줌 훔치고도 싶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저 세상을 여한 없이 쏘다니며 닿는 곳마다 느끼던 감동과
 존재감으로 나만의 노래를 부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갈수록 주춤하며 뒷걸음치게 하고 삶의 반경에도 금을 그어 욕심을 덜고 다만 감사하란다. 그러니 애증에 엮인 채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 달콤한 문명과 이기(利器)의 치열한 소통까지 내 삶의 알맹이가 분명할진대 여전히 허기지고 갈증이 날 때면 정말이지 두렵고 당황스럽다. 그게 스스로 쥐고 가는 욕심과 욕망 탓일 때면 더욱 힘들어 잠 못 드는 밤을 골라 무작정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찾아가 떠나는 열차를 한참씩 바라보고서야 풍선처럼 부풀던 마음이 잦아들며 온순한 내 자신으로 돌아오던 곳도 역시 기차역이었다.

  언젠가 남편이 보증을 서준 일로 문제가 생겼었다. 돕고 사는 거야 인지상정이고 직장 상사의 부탁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워 허락한 게 그만 화를 부른 것이다. 잠적해 버린 사람을 대신해 떠안은 채무로 삶은 삐걱거리고 어깨 처진 남편을 보기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상의 한 마디 없이 저지른 그 처사가 또 서운해 마음이 무겁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도 어김없이 찾아간 기차역에서 달리는 열차에다 그 엉킨 마음을 하나씩 던지고 오던 어느 날,부동산에 미련 없이 집을 내놓았다. 결국 살던 집을 그대로 전세 끼고 근처에 소문이 날 만큼 헐값에
팔아 빚부터 갚아버렸다.
  나라고 어찌 속상하지 않았을까. 왜 아쉽고 허탈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 두 딸이 결혼하면 정표처럼 남겨주려고 아이들의 얼룩진 배냇저고리 속에 하나씩 넣어둔 돌 반지 두 개를 빼고는 쌍가락지까지 몽땅 녹이며 불려온 집인데.
알량한 내 속이야말로 오래도록 자글자글 타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고 오히려 빠르게 담담해져 갔다. 오래 전, 이사 오던 날의 그 설렘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변화가 필요했던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졸지에 신혼처럼 도로 셋방살이 신세가 되었지만 거실도 부엌도 그대로고, 바닥을 차고 위로 오를 권리는 여전히 우리 것이어서 더 이상 기죽을 일도,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고 정리해 버렸다. 
살다 보면 그런 위기가 어디 한 번뿐이랴. 지금도 군데군데 보이지 않게 금이 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던 날들도 지나고 잃어버렸던 ‘우리 집’도 다시 장만해 살고 있다. 인생이란 열심히 치댄 흙이 뜨거운 열에 온갖 균열을 만들며 구워진 청자(靑磁)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릇 표면의 섬세하고 신비로운 무늬가 결국 도자기의 아름다운 바탕이 된 것을 보면서 내 삶의 수많은
잔금도 분명 나와 우리 가족을 완성시켜가는 멋진 밑그림이 되고 있을 거라 믿는다.
  과거로부터 달려와 다시 미래를 향해 가는 이 긴 여행길, 그 길 위에 놓인 정거장처럼 내 삶도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또 기차역에 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게
‘인생의 묘미’ 인 줄 알게 해 준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다 올 것이다. /

                                                                                                             <2012. 한국산문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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