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앓이
백 봉 기
난 요즘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벌써 수주일째다. 상사병의 증상이 이런 걸까. 짝사랑의 아픔이 이런 것일까. 병상에서 나를 일으켜줄 묘약은 없는지.
원인은 시(詩) 때문이다. 글 한 줄 쓰기가 이처럼 힘들어본 적이 없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더라면 이런 고통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누군가는 “시를 쓰려면 먼저 좋아하는 시 50편을 외우라”하고, 누구는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니, 일단 손을 내밀어 시와 친해지면 감동과 노래와 흥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지만 나에게 시는 장님 앞에 선 거대한 코끼리임에 틀림없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오늘도 스터디그룹에 다녀왔지만 끝도 시작도 모르는 숲 속을 헤매다 온 듯하다. 존재와 이미지란 단어만 구름처럼 떠다닌다. 다들 좋다며 고개 끄덕이고 박수까지 쳐준 시가 나는 눈 크게 뜨고 쏘아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늘도 <초록의 근육>에서「뼈끝마다에 / 소리 종(鐘) 매단 햇살이 / 밤 새는 줄 모르고 / 어느새 봄을 내밀고 있네.」한 폭의 그림이 연상되는 시인데도 나는 시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다 알려고 하지마라. 어찌 밥상에 있는 반찬을 다 먹으려 하느냐”는 교수님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한 때 막걸릿집에서 시 때문에 입씨름을 한 일이 있었다. 시는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한다고 말하는 이에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작가의 시심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시다. 그림에도 사실화와 추상화가 있듯이 시에도 색깔이 있고 표현하는 방법이 제 각각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본인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언성을 높인 사람이 있었다. 논쟁은 꽤 오래갔지만 지금 생각하니 나 같은 사람에게 일침을 가했던 게 틀림없다.
사실 나는 시에 대해서 논하거나 고민하고 있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사람이다.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시 한편을 외우지 못하고 있다. 한 때는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시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필요한 때에 외우려하면 막히는 데가 많았다. 한번은 전북시낭송가협회 행사에 초청자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1부 행사가 끝나고, 2부에서 초청 인사들이 나와 애송시를 낭송하는 순서가 있었다. 함께 참여했던 전북문인협회장과 문학관장님, 그리고 전주예총회장과 저명한 문사님들이 나와 멋지게 시 한 편씩을 낭송하고 들어갔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인데 중간쯤에서 앞뒤가 헷갈려 자신 있게 낭송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수필 쓰는 사람이라 낭송할만한 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여성들이 대부분인 자리에서 창피당하기 직전이었다. 순간 내가 좋아하는 대중가요가 생각났다. 자주 부르던 최진희의 <여정>이었다. 무대에 오른 나는 능청스럽게 노랫말을 시처럼 낭송했다.「떨어진 꽃잎 위에 바람이 불고 / 쏟아지는 빗소리에 밤은 깊은데 / 하필이면 이런 날 길 떠난 사람~」 방청석에서 고개를 꺄우뚱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옆 사람과 마주보며 이상하다는 듯, 어디선가 들어본 노랫말 같다는 듯, 눈치 채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재치를 발휘하여 다음 구절부터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고,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 일이 있었다.
아름답고 깊이 있는 시를 읽게 되면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뒷맛이 개운하다. 그런 시 한 편을 쓴다는 것. 독자의 마음에 두고두고 감동이 되어 애송시로 남게 한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희망일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런 시 한편을 쓰고 싶다. 내가 쓴 시가 좋아 어디서든 자신 있게 외울 수 있는 자작시 한 편을 갖고 싶다. 하지만 마음뿐, 멀게 만 느껴지는 그림의 떡이다.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서 인지. 교수님은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네. 마구잡이식으로 무턱대고 밀어붙이면 돼.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라며 용기를 주셨다.
교수님 말씀대로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면 될까? 그렇다. 사실 내가 처음 수필을 쓸 때도 마구잡이로 밀어붙여서 된 일이었다. 영화「시 Poetry」에 나오는 주인공 미자(윤정희)처럼 진정한 목마름으로 다가가면 뜻밖에 좋은 시 한 편을 건질지 누가 알겠는가. 어렵지만 도전하고 싶은 일이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마른 콩도 멈추지 않고 물을 주면 싹이 트고 콩나물로 자라듯, 부끄러움 두려움 떨치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가다올 때까지 많이 가슴앓이 하리다. 그래서 오늘도 퇴근길에 시집 한 권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