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關係)
사람을 일 년에 몇 차례만 만날 수 있다면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만나다 보면 긴장감과 밀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서로를 인식하는 최초의 몇 순간은 싱그럽고 아름답다. 그 무렵의 만남에는 긴장과 기대가 교차한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그저 상대방이 나와 주기만 하면 고맙고, 바라만 봐도 감정이 북받치며, 몇 마디 말이 오간 후 뒤따르는 어색한 침묵마저도 감미롭다. 차차 관계가 진전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대신 그 대가로 신비함을 잃는다. 무릇 선도(鮮度)는 여인의 치맛자락 같아서 움켜 쥐려하면 달아난다. 내보이면 상하기 마련이고 누구든 그것을 수치로 여기는 까닭인 것을. 항차 여인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야 말해 무엇 하랴.
만남엔 헤어짐이 따르기 마련이며 그것이 오히려 삶을 다양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헤어짐에는 그럴싸한 이유도 있고 필유곡절 없는 결별도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한번 헤어지면 여간해선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옛사람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오래 소식 없는 사람을 만나느니 모른 체 지내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도「인연」에서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썼다. 삶의 국면인 헤어짐과 그리움, 재회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상대방이 변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있어서이고, 나중 만났을 때 뒤따르게 마련인 환멸을 두려워하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나이테만큼 상대방은 변했다. 맑고 빛나던 얼굴 모습은 흔적조차 희미하고, 동질성이나 공통의 화제가 없으며, 처한 입장에 차이가 있고, 경험의 범위가 다르며, 지향 하는 바 또한 같지 않다. 그러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과 해후하는 일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한두 가지 못마땅하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기 십상이다. 만나고 가슴 아파 하느니 차라리 만나지 말 걸 후회하며 자책한다. 인용한 수필 끝 부분에 나오는 ''나는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구절도 그런 안타까움을 읊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십분 공감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만남과 헤어짐에 반드시 그러한 측면만 있는 것일까?
놓친 부분이 있었다. 상대방이 변했으리라는 것 이상으로 내가 변했음을 간과했다. 상대는 마음속에 20대 초반의 풋풋한 젊음으로 살아 있는데 나는 중년을 지나 시나브로 노년으로 편입되려 하는 것을 깜박 잊었다. '열정의 강도'와 '그리움의 순도'는 세월이 흐르면 퇴색하기 마련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표상(表象)에 집착한 것이다.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가 변한 모습을 대면했을 때 끼어드는 환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환멸이야말로 각성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큰 깨달음은 미망에서 헤어 나오게 하고 관계를 구체화 해준다. 그렇게 해서 얼마간 실체에 접근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 테지만.
지난 시절 사랑한 사람을 못 만나는 것도 안타깝지만 그에 못지않게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 오늘의 내가 있도록 길을 밝혀 준 사람들로부터도 떠나왔다는 사실이 사무친다. 그들과 만나지 못함에 여러 변명이 있을 수 있다. 현실과 환경이 마뜩치 않아서. 시간이 없고 쑥스러워서.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참다운 이유가 될 수 없을 터이다.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그러하며,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지 모른다. 귀찮아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혹 당장의 이해관계가 없어서 내켜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정작 중요한 사람들과는 마음뿐으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세월이 흐르며 나 또한 그립고 고마운 사람들과 '헤어짐의 약속' 없이 태연하게 헤어져 왔다. 헤어짐을 겪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성장의 걸림돌이라도 되는 양. 이제 시린 가슴으로 느낀다.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관계는 '죽은 관계'와 다름 없음을. 죽은 자와는 말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다. 우리는 '차디찬 곳'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체된 관계의 국면 전환을 위한 돌파가 필요하다. 실망을 미리 두려워하거나 아름다운 기억만을 간직하기 위해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함과 경건함이 결여된 태도일 수도 있다. 만나서 서로 변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중단된 관계를 진전 시켜야 한다. 환멸의 아픔을 넘어 서로를 보듬고 껴안아 줄 수 있을 때 참답고 성숙한 관계의 꽃이 핀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발전되는 관계야 말로 참다운 관계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다시 보았다. 책장 정리를 하다 우연히 눈길이 머문 것이다. 금발의 곱슬머리 왕자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나무 그루터기가 삐져나온 별 위에 서서 여전히 작은 칼을 쥐고 어깨에 별이 달린 초록색 망토를 걸친 채 나의 무심함을 탓하듯 슬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보석 같은 여러 이미지 중 사막의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한 말에 숨은 뜻이 적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길들인다는 것은 너무 잘 잊고 있는 것이지만,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바로 그 시간 때문이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게 되는 거지."
취약한 관계의 기미를 포착해 서로를 끊임없이 돌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 것인가. 나는 전에 이 책을 읽었으나 '길들임'의 본질을 수 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천착하게 되었다. 그것의 속내는 평상시 '내 형편이 좋을 때 그저 상대방에게 시간을 할애하며 공을 들인다'는 정도의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 형편이 뜻과 같지 않다 해서 나와 관계하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어찌 저버릴 것인가. 그들에 대한 책임은 '지속적으로 언제나 있는(恒存)' 것이다. '길들임'의 참다운 뜻은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세상일이 귀찮게 여겨질 때에도 상대방에 대한 마음 씀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방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말라는 교훈이었으며 이를 위해선 때로 자기희생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엄격한 가르침이었다. 참다운 관계의 꽃은 항폐하고 척박한 토양에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