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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같은 삶의 궤적    
글쓴이 : 이정희    13-04-06 09:34    조회 : 4,085
소설 같은 삶의 궤적
-푸슈킨박물관을 다녀와서
 
학정 이정희
 
 아내를 탐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오쟁이 진 남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단테스의 모욕을 참을 수 없다. 모욕 중의 모욕이다. 결투를 신청한다. 눈이 쌓인 벌판에서 입회인을 세우고 벌인 결투. 먼저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상처는 치명적이다. 이틀 후에 그는 숨을 거둔다. 38살 푸슈킨의 마지막 일화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이 돌아오리니
                 -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부분
 
 중학교 때 교실 뒷면 칠판 위에 액자로 걸려있던 푸슈킨의 시. 기억력이 아슴푸레해진 지금도 이 시는 저절로 읊어진다. 당시 슬픔이나 분노 같은 건 모르던 무구한 시절이었지만 교실에 들고 날 때마다 쉽게 읽히던 이 시가 마음에 박혔나보다.
 지난해 여름 러시아 문학기행에서 첫 번째로 관람한 곳이 푸슈킨 박물관이었다. 10여 명의 유명 작가들의 행적을 좇는 노정에서도 그의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고 그와 관련된 유적지가 제일 많았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추앙 받는 국민시인이자 영웅이었다.
 모스크바의 푸슈킨 문학박물관은 그 전시실의 규모와 인테리어, 방대한 자료와 자료에 손댈까 봐 번득이는 직원들의 감시의 눈초리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방마다 벽면 가득히 액자에 담겨 진열되어 있던 크고 작은 사진들과 유리관에 진열된 그의 초고 원고에서부터 다른 언어로의 번역본까지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그리도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관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국가였으니 자료의 유출이나 훼손은 물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의 모든 장르를 망라해 글을 썼던 작가다웠다. 작품 속의 인물 조각상들이 당시의 연회장 복식으로 포즈를 취하고 진열되어 있는 것도 특이했다. 출입문 위로 높이 조그만 발코니 난간이 보였다. 당시 거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너른 홀에서는 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좁고 검은 얼굴에 곱슬머리의 푸슈킨은 오래된 귀족 집안 출신인 아버지와 콘스탄티노플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표트르대제의 황실로 이송된 아비시니아(현재 에티오피아) 황태자 후손인 어머니를 두고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손님 접대와 향락을 좋아하는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전적으로 프랑스에서 이민 온 가정교사에게 맡겨서 어릴 적의 그는 프랑스어만을 듣고 말하고 습작도 프랑스어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 방에는 책이 산더미였고, 당시 유명 인사들의 잦은 방문으로 귀동냥할 게 많았다. 지혜로운 외할머니와 구수한 이야기 솜씨의 유모는 어린 푸슈킨에게 러시아 민담과 전통을 자주 들려주었고 이는 그의 정서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살 때 페테스부르크 외곽 짜르스코에 셀로에 생긴 귀족학교 리쩨이에 입학했다. 6년 동안 운동과목은 물론 수준 높은 교수들 밑에서 윤리학 같은 형이상학과 역사 지리, 수학 외국어 등을 배우면서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상은 물론 애국심과 미적 감각도 키워나갔다.
 재학 시절 푸슈킨은 대단한 장난꾸러기에 ‘볼품없는 집오리새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서정시를 발표해 문학적 재능만은 인정을 받아 15살에 당시의 쟁쟁한 문인들이 주축이 된 진보적인 문학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예카테리나 궁전이 있어 지금도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짜르스코에 셀로는 푸슈킨 사후 100주년이 되던 1937년부터 푸슈킨 시로 불린다. 궁전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긴 행렬에 서서 잘 가꾸어진 정원과 기념비들을 바라보며 10대의 분방했을 푸슈킨을 떠올렸다.
 리쩨이 졸업 후 외무성에 근무했던 그는 날카로운 정치풍자시 때문에 남러시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좋은 상관 덕에, 또는 친구의 도움으로 여러 곳을 여행하게 되고 혁명적 사상가 및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러시아 전통적인 농노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사상을 굳혔다. 이 시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가장 자유롭게 폭넓은 독서와 시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서사시 <루슬란과 루드밀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집필을 시작했다.
 
 푸슈킨의 쌈박한 단편소설 <마지막 한 발>을 여러 번 읽었다. 명예와 자존심을 중시하던 당시 귀족들의 모습을 짤막한 소설 속에 이보다 더 응축해 그릴 수 있을까. 명사수 실비오가 백작을 살려준 이유는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나는 두 번째 조우에서 다시 제비뽑기를 해 순서를 정하자는 실비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자체로 이미 백작은 명예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서로 팽팽하게 명예를 지키고자 했을 때 결투는 의미가 있었을 터. 결국 백작의 목숨의 칼자루를 쥔 실비오는 떠나면서 말한다. “자네를 자네 양심에 맡기겠네.”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인이 말년에 살았고 박물관이 된 아파트는 바로 앞에 운하가 흐르는 곳으로 ‘피의 성당’ 근처였다. 둥근 안뜰에 세워진 전신 조각상은 다른 곳과 다르게 모자를 든 왼손은 내려뜨리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일 정도로 비스듬히 뻗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친구이자 동료인 볼콘스키 공작의 저택이었다는 이 집에서 푸슈킨은 1년 전부터 아내 및 네 자녀와 함께 살았다. 그가 결투 때 입었던 양복조끼와 출혈로 사망했던 침대, 데스마스크 뿐 아니라 방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친구이자 시인 조코프스키가 대충 스케치해놓은 것에 따라 죽었던 날의 모습 그대로 재구성되었다고.
 2월이니 천지가 온통 흰 눈에 쌓여있었을 그때 푸슈킨이 장교인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고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와 사랑을 중시했던 30대 젊은 작가가 동서 격의 그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그 울분을 어찌 삭일 수 있었을까. 당시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그들은 모욕을 받았다고 느끼면 바로 결투를 신청하는 게 관례였고, 특히 신사의 보호 하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어머니나 아내, 애인을 유혹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최고의 모욕으로 여겼다니 말이다. 민담에 친숙했던 그의 기지와 예감으로 데카브리스트의 화난도 면했는데 마지막 운명의 여신은 시인의 편이 아니었던가.
 그 결투의 자리에도 어김없이 그를 기념하는 석비가 서 있었다. 오베리스크처럼 높게 솟은 윗부분 한 면에는 원형의 그의 초상이, 아래 중후한 기단에는 그의 생년(生年)이 새겨져 있었고 화분과 꽃다발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국민시인에 대한 추모였을까, 아니면 죽음을 불사했던 그의 남성적 기개에 대한 흠모였을까.
 
“시인이여, 민중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 열렬한 칭송도 순간의 소음이리라” “그대는 짜르; 혼자 살아라. 자유의 길을 가라” “보상은 그대 마음속에 있다. 그대 자신이 최고의 심판관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쓰면 되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의 푸슈킨의 시 <시인>에 나오는 몇 구절이다. 모두가 절창이다. 작가라면 누구라도 마음에 새겨둘 경구들이다.
 그는 곤차로바와 결혼해서 2남2녀를 낳았다. 아름다워 사교계의 관심을 끌었던 그녀와 신혼생활을 했던 파란색의 단정한 2층집이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그들 부부의 동상이 다정하게 서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기념촬영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드라마틱한 시인의 죽음 후에 단테스는 잠시 투옥되었으나 황제의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프랑스에 돌아가 높은 관직에까지 올라갔다니, 푸슈킨의 결투가 황실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일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7년여에 걸쳐 완성한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잉여인간적 생활상을 실감 나게 그려 밸린스키로부터 ‘러시아 생활의 백과사전’이라 격찬을 받은 작품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자랐으나 서구 문학의 소네트 형식을 빌려와 가장 러시아적인 인물상 예브게니 오네긴과 타찌아나를 창출한 작가 푸슈킨.
 20대 초반 남부 러시아 유배 때는 바이런에 심취하여 서구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키로 추방되었을 때에는 세익스피어에 탐닉하여 그 영향으로 사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집필하며 사실주의에 빠져들었다. 엄청난 독서광에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서정시와 서사시, 장편, 단편소설, 희곡 등 문학의 모든 장르를 다 섭렵한 시인. 그의 작품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푸슈킨 연구가 석영중 교수의 표현대로 ‘보편성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외래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의 수용은 물론,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도 아울렀다. 그는 언제나 주제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기존의 문학작품 속에 바탕을 두되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창조해냈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에프스키 등 19세기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다 그를 계승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확보했다.
 그의 작품들은 작곡가들에게도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람스키코르사코프의 <모짜르트와 살리에리> 등등.
 
 푸슈킨 거리, 푸슈킨 광장, 푸슈킨 시, 푸슈킨 미술관, 푸슈킨 박물관, 푸슈킨 러시아문학연구소, 푸슈킨 기념비와 동상들, 그리고 푸슈킨 대학에다 심지어 푸슈킨 표 보드카까지 있으니 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칭송과 자랑은 여전히 가시적이고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산문>>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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