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예나(Luna Llena)
살면서 갖는 몇 가지 물음이 있다. 그 중 하나만이라도 답의 언저리에 닿으면 현자(賢者)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신(神)은 누구인가?"이다. 이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거대하고 광범위한 담론일 것이지만, 그에 대해 아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준 사람은 없다. 아니 "신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앞서 신이 존재하는지조차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어떤 이는 신을 보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은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신이 원래 있었는데 나중에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다음 물음 역시 만만치 않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몇 가지 정보로는 충분치 않다.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한참 들여다보아도 모습이 흐릿하기만 하다. 거울 속 얼굴은 마침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다운 나'의 모습은 근원적이고 선험적인 것 같기도 하다. 듣기로 불교에서는 "나를 찾으려면 나를 죽이고 용맹 정진하라" 권하고, 기독교에서는 "처음부터 나를 버린 채 절대자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친다. 두 종교의 입장이 비슷해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나의 좌표와 위치가 바로 서야 다른 것과의 신실한 관계 맺음이 가능하리라 하는 점일 테지만.
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높은 곳을 향해 갈구해야 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제3의 인물'은 실생활에서 삶의 질이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그뿐 아니라 바로 옆에, 손닿는 거리에 존재한다. 그와의 친연성(親緣性) 정도에 따라 될 일이 아니 되기도 하고 안 될 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더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단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허구적이고 취약하기도 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 엄청난 풍파가 몰아쳐 일순에 삶이 좌초되기도 한다.
한때 그 사람은 열정과 흠모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 사람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리라 약속도 했었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내가 눈이 삐었지." 다짐이 자조로 바뀌기도 하고, "그땐 왜 그랬을까?" 절로 한숨도 나온다. 만에 하나 그런 눈치를 보이거나 말을 잘못 흘렸다간 되 담지 못할 '말[言]'을 '말[斗]'로 되돌려 받고 쩔쩔매기도 한다. 단단한 받침목이 되리라 호언했던 다짐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을 본다.
그 사람은 고유한 인사고과 기준으로 반찬 가지 수를 마음대로 정하고 음식점에선 '양푼 냉면'을 선호한다. 전철 안에서 발을 벌린 채 엉버텨 앉고, 출발하려는 버스에서 잽싸게 뛰어내리는 묘기도 선보인다. 함께 거리를 걷다 어깨에 손이라도 두르면 남세스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뿐인가. 한번 토라지면 어긋난 관계를 개선하기 일 또한 쉽지 않다. 그러려면 우선 안방을 "풀방구리 제집 드나들듯" 하는 강아지 눈치를 살펴야 한다. 동물은 권력의 이동이나 변화 추이에 민감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 진전을 도모하려면 나보다 서열이 앞서 총애를 받는 강아지에게 밉보여서는 안 된다. 평소 내신 점수를 잘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고.
그 사람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재주도 지니고 있다.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들면서도 도대체 피곤한 기색이란 없다. 수틀리면 몇날 며칠 말이 없고, 빈말이라도 칭찬을 해주면 짐짓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다. 또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노상 딸그락거린다. 표(表)가 안 나서 그렇지, 그래도 그렇지, 늘 무슨 일인가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심지어 잠 잘 때도 무엇인가 하더군. "푸훗!" 작은 고래가 수증기를 내뿜는 듯한 잠꼬대. 가위에 눌리는지 간간히 신음소리도 낸다. 아니, 그 사람은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이 말하더라. "아내는 잠속에서 소리 죽여 우는 법을 배운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인가? 곰곰이 헤아려보니 그 사람이 누군지 관심을 두기는커녕 웅숭깊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그런 것이려니 당연하게만 여겼다. 이제 그 사람도 더 이상 꽃다운 나이가 아니건만. * 루나 예나(Luna Llena). 설핏 잠든, 밭이랑처럼 주름 잡힌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생각한다. 그 사람의 청춘을, 지난날을, 빛나던 젊음을 편취(騙取)한 자가 누구인가를. 나쁜 녀석!
* 루나 예나(Luna Llena): 만월(滿月)이라는 뜻. 라틴 그룹 로스 트레스 디아망테스( Los Tres Diamantes)가 부른 비가(悲歌). 우리에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사랑스런 번안 제목으로 널리 알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