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김창식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nixland@naver.com
* 홈페이지 : blog.naver.com/nixland
  어제 내린 비    
글쓴이 : 김창식    13-09-17 14:46    조회 : 8,647

                                          어제 내린 비 
 
 여름의 끝자락이 엊그제 같더니 아침저녁 살갗에 닿는 소슬한 바람으로 좁쌀 소름이 돋아요. 올해 장수(長壽) 장마는 강우량도 많은 데다 지겨울 만치 오래 계속됐어요. 한 번 비가 오면 몇 날 며칠 주야장천 내려 원망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변덕스럽다더니, 비가 또 왔으면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니까요. 비야 원래 감성을 자극하는 시적 은유물이기도 하지만.
 지난여름 지루한 기다림 끝에 그예 비가 오던 날 거리에 나가봤어요. 매캐한 흙냄새가 끼쳐오는데 가판대의 신문들이 새의 젖은 날개처럼 엎뎌 있어요. 노란 고무줄을 두른 비닐 비옷을 입은 채 말이에요. 오랜 만에 좋은 소식이 있나 봐요. 신문마다 안개 자욱한 거리가 있네요. 비나리오~ 비나리오~. 비 오는 날이면 촉촉이 적셔오는 추억이 있답니다.
                                                                   *
 그 무렵 마음에 두었던 여학생은 토요일이면 모임을 갖는 독일어회화 동아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에겐 '오를레앙의 처녀'나 지혜의 부엉이를 거느린 '미네르바' 여신 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온유하고 상냥한 데도 선뜻 다가서기가 어려웠다그녀와 나 사이에도 모종(某種)*에트바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회합이 끝나면 같은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공하는 언어, 음악, 청춘의 꿈과 방황,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특별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어느 날 함께 좌석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녀의 집이 한 정거장 전이어서 그녀가 먼저 내렸고 요금은 내가 내기로 했다.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오자 불안이 고조되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여차장에게 100원을 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80원을 거슬러주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스름돈은 60(당시 요금 20x 2)이었다. 나는 황급히 20원을 되돌려주었다. 그래야만 그녀와 내가 함께 차를 탔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돌이켜 보면 한 여자에 대한 연모의 감정과 '정확한 요금 지불' 사이에 무슨 대단한 관계가 있겠는가마는, 그 사실이 당시에는 무척 중요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어느 토요일인가 또 한 번은 새벽부터 시작한 비가 종일토록그치지 않았다. 밤이 되어 흠뻑 젖어 함께 차를 탄 적이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날 밤 버스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물이 도랑이 되어 흘러내렸다. 비가 더욱 세차게 퍼붓는가 보았다. 버스는 강에 잠긴 도시를 떠가는 배 같았다. 바깥 거리 모습이 음울한 판화 속 풍경처럼 다가왔다가 뒤틀리며 물러나곤 했다. 우리는 서로 침묵했다. 이지러진 밤거리를 배경으로 창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이 그날따라 생경하게 느껴진 것은 웬일이었을까. 그때, 그녀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해요. 이처럼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짐짓 우울한 목소리.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창밖을 보며 좀 더 비가 왔으면 하고 바라는 나 자신을 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생기를 띠었다가 다급해졌다.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또 그 사람의 마 음속에 닿고 싶은.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얼굴은 목적지에 닿은 예언자처럼 피곤해 보이면서도 왠지 평화스러움이 감돌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 비가 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비가 좀 더 왔으면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바보 같으니!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녀는 여느 여자가 일생동안 한 번 하기도 힘든 신탁(神託)을 내비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랑에 대하여 담론하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면서도 듣기를 꺼려했던 비밀을 엿본 내 마음은 무거웠다.
 여자와의 관계란 이상한 것이어서 친밀한 사이였는데도 마음에 짚이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한순간에 '차나 한 잔' 할 수 없게 되는 수가 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전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변화의 조짐이 느껴졌다. 토요 회합에 잘 나오지 않았고, 나온 날도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번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제법 멀리 나돌았다.
                                                                 * 
 마음속에 소나기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비를 머금은 후텁지근한 바람이 이는 것을 보니 오늘도 비가 오면 좋으련. 아니 벌써 빗방울이 듣나봐요.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내[]를 이루고 강()이 되어 '어제의 하구(河口)'로 흘러갑니다. 때마침 윤형주의 노래가 들려오네요.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 에트바스(etwas): '그 무엇'을 뜻하는 독일어. 영어로 something.
                                                                            
 

 
   

김창식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55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90286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92296
40 독박 김창식 11-08 10411
39 닭 블루스와 알테 리베의 추억 김창식 10-16 33444
38 피항(避港) 김창식 07-26 7169
37 부끄러움 김창식 05-08 6448
36 사랑채 삼촌 김창식 07-07 5822
35 1.5층 김창식 03-01 5849
34 시간을 찾아서 김창식 11-30 7481
33 김창식 07-17 6050
32 발걸음 소리 김창식 03-12 6861
31 11월의 비 김창식 11-26 6367
30 송곳 김창식 11-25 7873
29 상실의 시대 김창식 05-27 8708
28 봄봄 김창식 04-05 6616
27 웰컴 투 마이 월드 김창식 10-25 30888
26 창(窓)-제7회 흑구문학상 수상작 김창식 06-10 10841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