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김영도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dudeh16@naver.com
* 홈페이지 :
  멧돼지를 맞닥뜨렸을 때    
글쓴이 : 김영도    24-06-18 17:01    조회 : 1,073

멧돼지를 맞닥뜨렸을 때

 

김영도

 

폭염경보를 등에 업은 태양이 입추가 무색하게 이글거린다. 이런 날에는 무념무상으로 에어컨 아래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이다. 아침 내내 어떤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지 않을까 궁리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물통에 물을 담는 남편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야 할 판이다. 침대와 책상을 벗어나지 않는 나를 위한 거라며 주말마다 산행을 강요하는 남편이다. 거부할 명분이 없으니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매미 울음이 사방에서 덮쳤다. 이 계절이 다하기 전에 존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겠지. 요즘 들어 부쩍 게을러진 내 모습이 곤충만큼도 못한 것 같아 괜스레 짜증이 났다. 애먼 매미한테 눈을 흘기며 넌 짧게 살다 가니까 그렇게 치열하지, 난 오래 사니까라며 듣지도 않는 변명을 하며 걸음을 더했다.

중턱에 이르자 목 잘린 떡갈나무 가지가 융단처럼 깔렸다. 김숙 작가의 글에서 본 나뭇잎 비행기였다. 발걸음을 멈추고 손에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떨어진 가지 끝이 칼로 벤 듯이 반듯하게 잘려있었다. 거위벌레의 모성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신기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나뭇가지를 들고 잘난 척을 했다. 마치 파브르가 된 듯이 거위벌레의 한살이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데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쉿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여간해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인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멧돼지가 지나갔어라고 말하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은 굳은 얼굴로 호랑이만큼 큰놈이었다며 대뜸 휴대폰을 열고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대처법을 검색했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살아있는 멧돼지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인터넷에도 별다른 대처법이 있지는 않았다. 등 돌리지 말 것, 위협하지 말 것 정도였고, 농가에 내려오는 멧돼지 퇴치법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억지로 끌려온 산행을 끝낼 좋은 기회다 싶어 빨리 내려가자고 했다. 오히려 멧돼지가 간 길과 반대로 가려면 정상으로 향해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몇 발짝 걷다가 갑자기 나무를 탈 수 있냐고 물었다. 여차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게 안전하다며 진지하게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무에 올라가다 떨어져 죽겠다며 비웃었다.

10분쯤 지났을까. 묵묵히 걷던 남편이 좋은 생각이 났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에서 화난 호랑이 울음소리를 찾았다. 동물의 본능을 이용한 기막힌 방책이라며 의기양양했다. 멧돼지가 다시 왔을 때 이 소리를 크게 틀면 두려움에 빠져 줄행랑을 칠 거라며 낄낄거렸다. 멧돼지가 호랑이를 알까 미심쩍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싸했다.

실물을 보지 못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남편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오르지도 못하는 나무타기를 생각하고 호랑이 울음소리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

2주 전에도 우리는 이 산에 왔다. 우리가 못 봤을 뿐 멧돼지는 그때도 있었을 것이다. 몰랐을 때는 두렵지 않았으니 오늘도 못 봤다고 생각하면 될 터였다. 얼마나 크고 시커먼지 못 봐서 그렇다며 입을 삐죽거리는 남편은 멧돼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본 것과 못 본 것의 차이, 무지에서 오는 용기와 알면서 가지게 되는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오갔다. 거위벌레나 매미의 한살이는 아는 만큼 신기한데, 사람살이는 알아 갈수록 어렵다. 어느 만큼 보고, 어디까지 아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 보아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야 하나.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듯이 머릿속이 복잡했다.

남편이 새로운 대책을 내놨다. 동물은 담배 냄새를 싫어할 테니 담배 세 대를 한꺼번에 피워서 연기를 내뿜으면 될 거라며 눈을 반짝였다. 점입가경이다. 담배 연기에 멧돼지보다 내가 먼저 도망가겠다며 눈을 흘겼다. 하물며 가방에는 담배가 있지도 않다. 설사 있다고 해도 눈앞에 멧돼지가 떡하니 섰는데 핸드폰을 꺼내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틀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여유가 있을 거 같지도 않다.

창졸간에 당하는 위험에서 세워둔 방책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커다란 위험을 맞닥뜨리지 않고 반백 년의 세월을 살았다. 고마운 일이다. 남은 시간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위험의 실체를 슬쩍이라도 본 남편은 궁리가 많지만, 멧돼지의 터럭 끝자락도 보지 못한 나는 대책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내놓은 방책이라는 것이 모두 황당한 것을 보면 애초에 미리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유용한지도 잘 모르겠다.

정상에서 숨을 돌리던 남편이 엄마 품을 확인한 갓난아기처럼 밝은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 같이 가는 게 가장 무난한 방법이란다. 여럿이 있으면 멧돼지가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니 안전하다는 결론이다. 나무에 오르고, 호랑이 울음소리를 틀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거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다. 아무리 사나운 멧돼지라도 하나로 뭉친 사람을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안심이 된다.

현관에 들어서자 나른하게 누워있던 고양이가 일어서지도 않고 눈인사를 했다. 미심쩍던 동물의 본능을 확인할 기회였다. 남편은 기대에 차서 핸드폰을 꺼내 호랑이 울음소리를 틀었다. 호랑이가 힘차게 울어댔지만, 고양이는 심드렁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머쓱해진 남편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멧돼지를 못 본 나와 호랑이를 모르는 고양이가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처럼 함께 어울려서라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고양이는 진짜 호랑이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

 

 

책과 인생2023.11



 
   

김영도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8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86182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87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