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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오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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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잔    
글쓴이 : 오윤정    14-11-25 23:35    조회 : 13,149
 
 
 
 
빈     잔 (盞)
 
 
 
 
 
 "아버지 많이 드세요."
스물 여덟 번째 맞는 아버지의 기일이다. 40여년 만에 건네는 인사가 낯설게 입가를 맴돈다.
 
 "네 고향은 어디냐?" "내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예요."  어린 시절 앵무새 같은 나의 대답에 아버지의 입꼬리는 귀에 걸리곤 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진남포이다. 고기잡이를 하셨던 할아버지는 해방 후 세상이 어수선하자 배를 팔아 아들형제를 월남시키고, 나머지 가산을 처분하여 내려올 계획이셨다. 몇 해 지나 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선이 가로막아 조부모님과 아들형제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월남 후 아버지는 중매로 엄마를 만나셨다.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매너로 순진한 엄마의 환심을 샀다. 모직코트를 입은 깔끔한 헤어스타일의 모습이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를 연상케 했다고 했다. 출가가 늦어져 엄한 외할아버지의 눈칫밥을 먹던 엄마에게 자동차 정비공장 사장인 총각은 구세주였다.
 엄마의 장밋빛 인생은 그리 길지 못했다. 자동차 정비공장은 결혼 전 남의 손에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고, 신혼생활 몇 달 지나지 않아 예물로 받은 가락지 등을 내다 팔아야 했다. 배움이 많고 사람 좋은 큰 아버지는 아우의 가산 탕진 소식에 담담하셨다니 아버지의 전적이 꽤나 화려했던 모양이다.
 방랑기가 있던 아버지는 바람처럼 집을 떠났다 돌아오곤 했다. 꽤 많은 돈을 벌어오기도 했으나 씀씀이는 그 돈을 오래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롤러코스터 타듯 결혼생활을 했다. 출가외인이라는 외가의 무심함에 혼자 견뎌내야 했다. 내가 태어난 해 아버지의 외유는 비로소 멈췄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 아버지는 서울운동장 건너편에서 양품점을 하셨다. 맞춤 셔츠와 커프스 버튼, 란제리를 파는 가게였다.
 딸만 둘을 두신 아버지의 딸 사랑은 유별스러웠다. 작은 딸의 머리 손질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체육복과 손수건에 이름을 수놓아주던 이도 아버지였다. 남자선생님들에게는 넥타이, 여자선생님들에겐 반드러운 란제리를 선물했으니 일찍이 치맛바람이 아닌 바지바람을 일으키신 셈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내 안에 또 다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이였다. 웃음 뒤에 감춰진 엄마의 눈물을 눈치 채고부터였다.
 오후가 되면 아버지는 주변 서너 곳의 다방으로 출근을 하셨다. 엄마의 스파이를 자처했던 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딸을 맞는 아버지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린 딸의 다방 출입을 나무라기는커녕 즐기시는 눈치였다. 계란 반숙이며 우유를 내어 주는 다방마담들이 내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작은 엄마'라고 부르라며 놀리는 다방마담을 하얗게 흘겨보고 돌아서면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내 뒤에 낭자했다.
어리다고 듣는 귀가 없을까! 노류장화(路柳墻花)같은 그녀들이 아버지의 여인들임을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깝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저녁, 아버지의 큰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단풍놀이 다녀오신 아버지의 여행 가방에서 발견된 어느 여인과의 흑백사진이 불씨였다. 적반하장이었다. 아버지의 후안무치에 엄마는 파르라니 질린 채 대거리조차 못했다. 숨어있던 내 안의 아이가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배를 들이받으며 "나가 죽어." 라고 외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두의 놀란 눈빛은 내 얼굴에 가시처럼 박혔다. 아버지만 기막힌 듯 헛웃음을 웃으셨다.
 그날 이후 늦게 귀가한 아버지를 위해 자다 깨어 노래하던 아이는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엄마를 애민(哀愍)해 하는 아이만 남았다. 아버지의 무절제한 생활과 엄마의 인내는 계속되었으나 다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 다닐 즈음 먹구름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선거자금을 대주었던 국회의원의 연이은 낙선 여파가 우리의 몫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낭비벽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부도를 내신 아버지는 시골 낚시터에 은신했다. 집에 남아 뒷수습을 해야 했던 엄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림질한 옷가지와 하숙비를 전해 주고 오셨다. 날개 꺾인 와중에도 아버지는 하숙집의 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셨다고 했다.
 무너진 살림은 회복될 기미가 가뭇없었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 흐르는 미움의 강을 나는 다시는 건널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쉰세 번째 생일을 하늘나라에서 맞으셨다. 두 해 지나 돌연 아버지도 떠나셨다. 엄마와의 이른 이별이 아버지 탓이라 여겼던 독한 딸은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유품인 아버지의 지갑 속에서 빛바랜 내 사진을 발견했으나 잠시 울컥했을 뿐이었다. 언니가 미국으로 간 후 혼자 제사를 모셨던 20여 해 동안 나는 "엄마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하며 헌작(獻酌)해 왔다. 두 분의 술잔을 올리면서도 아버지의 잔엔 내 마음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기일을 며칠 앞두고 부쩍 아버지 생각에 잠겼다. 명절 즈음 술에 취해 부르시던 <전선야곡>은 두고 온 고향땅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평양 유학시절 해야 할 공부대신 아코디언이며 기타를 배우셨던 넘치는 끼는 아버지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거친 파도를 몰고 왔던 낭비벽도 자라오신 환경 탓이었을 것이라고 이제 이해하고 싶다. 작은 딸의 오랜 외면에 쓸쓸했을 마음도 헤아려져 코끝이 시리다.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음악을 즐기시던 아버지, 가을이면 내 손을 잡고 고궁을 찾던 아버지. 향원정 단풍의 조락과 연못의 물그림자를 바라보는 쓸쓸했던 모습이 내 기억 한편에 접혀있다. <<내 청춘 마리안느>>의 안개 낀 호수의 몽환과 루이 암스트롱의 매혹적 저음을 공감해주던 아버지였기에 엄마는 용서와 기다림의 긴 세월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세월을 잘못 고른 로맨티스트였을 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 살다보니 아픔은 남았지만 미움은 사라진다. 스물여덟 번째의 기일을 맞으며 질기고 긴 미움의 세월을 접는다. 그리고 화해의 잔을 올린다.
 
 
 
 
 
<한국산문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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