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사는 앨리스
옆집에 앨리스라는 영국 여자가 혼자 산다고 들었을 때, 스모키의 노래가 떠올랐다. 만약 그 노래가 아니었다면 남편이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강렬한 추억의 노래 제목 덕분에 의심의 구름은 금세 사라졌다.
트리폴리로 먼저 떠난 남편에게서 국제 전화가 왔다. 우리가 살 집을 급히 구하느라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은 건성으로 들렸고 “집이 바닷가에 있다”라는 말과 ‘앨리스’라는 단어만 크게 귀에 들어왔다.
스모키의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라는 노래 가사는 이렇다. 앨리스 옆집에 사는 소심한 남자가 24년 동안 사랑 고백을 못하고 애만 태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이사를 가버린다는 슬픈 이야기다. 담배 연기처럼 몽롱한 사운드로 유명한 스모키의 음반을 틀어놓고 크리스 노먼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따라 흥얼거려본다. 대학 시절에 이 노래를 함께 목청껏 불렀던 친구들—성란, 진경, 선화, 소영이가 그리워진다.
샐리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죠/ 그녀는 말했어요 “네가 앨리스 소식 들었나 해서….” / 난 창문으로 달려가서 밖을 바라보았죠/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큰 리무진이 앨리스네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죠.
오랜만에 감미로운 기타 연주와 경쾌한 록밴드에 몰입한 내 심장이 드럼 소리와 함께 쿵쿵 뛰었다. 해외 이삿짐 꾸리느라 바쁜 중인데 슬픔의 체념이 녹아 있는 아련한 노래에 취해 마음은 벌써 트리폴리 바닷가, 상상 속 아름다운 그녀의 집 옆으로 날아가 있었다.
팬암기 폭파 사건으로 트리폴리 공항이 폐쇄되어 튀니지에 내려 국경을 넘어야 하는 멀고 험한 여정이 두려웠지만 언제 이런 나라를 가볼 수 있을까. 좋은 기회로 여기자고 용기를 냈다. 지구 끝까지라도 가족은 함께여야 한다는 남편의 지론에 찬성하며 아프리카 지도 맨 위쪽 가운데 있는 나라, 리비아로 떠났다.
어떤 직원 가족은 대형 이삿짐을 배로 실어 보내는데 나는 웬만한 건 친척에게 나눠주고 신혼 가구만 친정집에 두고 간단한 짐만 비행기에 실었다. 신혼집 빌라 이웃이던 2층 멋쟁이 할머니와 그 앞집에 사는 태공이 엄마랑 정이 듬뿍 들었기에 헤어짐이 무척 섭섭했다. 새댁이라는 이름을 처음 불러준 그분들. 살림도 가르쳐주고 맛난 음식도 나눠주던 따스한 정을 잊을 수 없어 이별하던 날은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레가타, 우리가 사는 빌라는 넓고 한적한 동네였다. 2층짜리 낮은 빌라들 500세대가 여유로운 간격으로 조성되어 있고 레스토랑, 세탁소, 빵집, 카페 등 편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주변에 야자나무 외에 이름 모를 키 큰 나무들과 식물들이 많아서 열사의 나라에 온 게 맞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1층인 우리집 앞 큰 나무는 침엽수처럼 뾰족하고 부드러운 나뭇잎이 잔가지에 솔잎처럼 무성한데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멀리서 보면 수양버들 같기도 했다. 그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내진 못했지만 한여름 뜨거운 태양도 잘 견뎌내고 겨울철 갑작스러운 폭우에도 끄떡없었다.
이제 앨리스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면 바랄 게 없으리라. 당시 유명했던 ‘오성식의 팝송 영어’ 교재를 열심히 들으며 한 마디라도 잘해보려고 틈만 나면 혀를 굴리며 큰소리로 스피킹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누군가 벨을 누르지 않고 현관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금발의 덩치 좋은 아줌마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우리 차를 실수로 긁었다며 수리비를 주겠다고 했다. 오수를 즐기던 남편도 놀라서 일어났다. 약간의 스크래치일 뿐이라 돈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자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낡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가버렸다.
“서양 사람들은 참 양심적이네.” 내가 감탄하자 남편이 말했다.
“저 여자가 우리 옆집에 사는 앨리스야.”
순간, 묘한 실망감이 스쳤다. ‘외모지상주의라니… 나도 참 속물이다. 머릿속 앨리스는 늘씬하고 젊은 금발 미녀였는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웃기고도 슬펐다.
앨리스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점점 늘어갔다. 그녀는 냉정하고 도도했다. 우리 아이들이 집 앞에서 놀아도 아는 척은커녕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용기를 내어 "하이~!" 하고 인사하면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길 한 번 주는 데도 인색했다.
집 전화가 불통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에 가서 급한 전화 한 통을 빌려 써야 했던 날 처음으로 통성명을 나눴다. 그런데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너 말레이시아에서 왔니?”라고 물었다.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내 피부는 동아시아인의 평균적인 밝은 노란색인데….
집에 돌아와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파운데이션을 하얗게 바르기 시작했다. 영국 오일 회사에 다닌다는 그녀는 상상 속의 우아한 숙녀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웃사촌으로 친해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문득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알려진 영국이 떠오르며 심기가 불편해졌다. 게다가 ‘사우스 코리아’를 잘 모른다니 기분이 두 배로 나빠졌다.
K팝이나 한류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이었지만 당시 트리폴리에서는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남편 회사도 발전소 공사 등 여러 가지 굵직한 사업으로 유명했기에 리비아에서는 한국인을 호의적으로 대했고 대접도 융숭했다. 그런데 정작 옆집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때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방탄소년단이 알려졌더라면 그녀가 나에게 좀 더 친절했을까? 영화 「오징어 게임」을 봤다면 달고나 만드는 방법이나 딱지치기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며 더 친근하게 다가왔을까?
쌀쌀맞은 그 영국 여자는 5월만 되면 비키니를 입고 오픈된 정원에서 온몸에 오일을 번들번들하게 바르고 벌렁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트리폴리의 5월은 태양이 뜨겁긴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너무 성급해 보였고 이웃집 남자가 옆으로 지나가거나 말거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며 겨우 나에게 물었던 말은 “너는 왜 선탠을 안 하니?”였다.
계속 물어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파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저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첫 해외 생활의 이웃은 기대와 달리 노래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소심한 앨리스네 옆집 남자처럼 설렘을 느꼈던 나는 앨리스를 처음 만난 날부터 환상이 깨져버렸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실망만 커져갔다. 앨리스를 사랑하는 남자를 오래 지켜보며 마음 졸이던 샐리에게로 나는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녀는 말하길 “앨리스는 갔지만 난 여전히 여기 있잖아./너도 알잖아, 나도 24년간 널 기다려 온걸.”
뜻밖에도 나의 샐리들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레가타에는 한국 가족이 세 가구나 있었고 당시 2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한인사회는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이미 우리 가족에 대한 정보를 다 얻은 상태였으며 몇몇은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려고 대기 중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혀를 굴리지 않아도 되고 김치도 나누어 먹으며 신참내기 동포에게 필요한 정보를 아낌없이 알려 줄 친절한 동지들이 앨리스에게 가려져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앨리스의 환상은 바로 포기했지만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는 잠시나마 즐거운 꿈을 꾸게 해주고 상상의 섬으로 초대해 준 나의 애창곡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내가 앨리스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편견이 심한 동양 여자에게 전화도 빌려주고 선탠도 해보라고 권하지 않았던가? 단지 언어의 벽 때문에 진심을 나누지 못했던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