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현
위로 세 살 터울인 형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난 그 형과 함께 매일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남달리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해서는 아니었다. 마을에 같이 학교에 다닐 친구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누가 보면 형제 아니랄까봐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한 탓이다. 형이나 나나 아침잠이 많아 늦게 일어나니 같이 등교할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 우리 형제를 어머니는 아침마다 전쟁 치르듯 깨우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큰 불효였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자식 늦잠 자는 자체가 창피한 일이었다.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고 해가져서 다시 돌아오는 삶이라야 누구라도 떳떳한 시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아버지는 새벽같이 들에 나가고 몸살 중이던 어머니가 늦잠을 주무셨다. 덕분에 우리 형제까지 늦도록 단잠을 잤다. 그러나 달콤한 것은 언제나 짧은 법, 중천에 뜬 햇살에 깜작 놀란 나는 허겁지겁 등교준비를 해야 했다. 아침밥을 거른 것은 물론이고 고양이세수로 알록달록한 얼굴로 학교까지 뛰어서 갔다.
그런데 십리 길을 마라톤 등교한 보람도 없이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아침조회가 끝난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가기가 너무 무섭고 싫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불안감으로 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아! 오늘 하루는 땡땡이다!”
형은 명령했고 나는 복종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마주잡고 용감하게 가던 길을 되돌렸다. 목적지는 등굣길의 중간지점에 있었던 철길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놀자니 선생님 눈에 띌 것 같고 마을 근처에서 놀자니 마을 어른들 눈에 띌 것 같아 안전하게 하루를 보내자면 그곳이 딱! 이었다.
두어 시간에 한 번씩 기차가 지나갔다. 그때마다 침을 발라 철로 위에 놓아두었던 대못이 기차바퀴에 납작하게 만들어졌는지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아무런 쓸모없는 칼 비슷한 무엇을 이상하게도 자꾸 만들고 싶었다. 여느 때처럼 형은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날만큼은 고분고분 형의 말을 잘 들었다. 이렇게 척척 죽이 잘 맞는 형제였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기차가 지나지 않는 시간에는 울창한 코스모스 사이로 아지트 비슷한 걸 만들어 놓고 나란히 누웠다. 양반자세로 다리를 꼬고 누워서 가을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칠판위로 선생님 대신 비행기가 하얀 분필가루를 품으며 지나갔다. 고추잠자리는 군데군데 중요한 구절마다 붉은색 밑줄을 긋고 갔다. 정말 행복했다. 부모님께 결석을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없는 세상이라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학기말에 한 학년씩 올라가면서 결국 사단이 났다. 형이 개근상을 받지 못한 것이 문제였고 더 큰 문제는 나는 개근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임신 중이셨던 담임선생님이 그날따라 출산휴가를 가신 바람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석 처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에라 인석아! 장남이라는 거시, 니 동생한티 챙피하지도 않은 겨?"
안방 벽에 나란히 붙여진 지난 학년의 상장들 옆에 새로 받은 나의 개근상을 밥풀로 붙이던 어머니가 계속해서 형을 혼내셨다.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쑥스럽던지 형의 얼굴을 쳐다보기 민망했다. 뭐라도 변명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소심한 나로서는 나도 결석했다고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이 부모님께 이를까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나 형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별일 없던 사람처럼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놀러 나가버렸다. 그런 형은 어려서부터 나와 많이 달랐다. 나보다 힘이 셌지만 마음은 약했다. 나보다 키도 크고 훤칠했지만 공부를 못했다. 또 나보다 의리가 강했지만 집안일을 볼보는 것에 심드렁했다. 때문에 형은 일찍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 대신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야 했지만 방랑을 택했다. 스스로 자유라 했지만 일가를 이루지 않는 삶이었다. 모든 것이 차남인 내차지가 되었다. 참으로 형이 미웠고 슬펐다. 그래서 소심한 반항을 했다. 부모님의 기제사를 내 집에서 모셨고 산소를 가꾸는 일도 이십 수년간 나누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반항이 수그러드는 중이다. 어쩌면 그런 형의 삶도 스스로에게는 최상이 아니었을까. 형제간의 인생 선택지문이 딱히 같아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관계라는 것이 지난 내 생각처럼 꼭 그렇게 무엇인가를 주고받아야 유익한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추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서로에게는 서로가 충분한 언덕이었으리라.
인생이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그렇더라도 살다보면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 기왕에 정해진 길이라면 긍정적이라야 유익한 법. 앞으로는 형에게 틈나는 대로 문자메시지라도 보내며 살 생각이다. 혹시 오래 전 같이 결석하고 형만 개근상을 받지 못한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지. 그때 어머니께 혼났을 때 정말 내가 밉지 않았는지. MMS문자 몇 줄이라도 내게 거인처럼 컸던 그날의 형을 불러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