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꾼 고스돕(이효석과 나)
이 우 중
초등학교 때 학적부에 장래 희망을 과학자라고 썼다. 깊은 산골, 밤마다 하늘을 가로 질러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천문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30대의 나는 유년의 꿈 천문 과학자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가까운 통신기술자 직업을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약골이었는데 결국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맞아 직장을 8개월을 휴직하였다. 1990년 9월 다시 회사에 복직하고 이듬해 여름 동료직원 세 명과 평창군 대화 읍에 2개월 보름의 장기체류 일정으로 업무를 보러 출장을 떠났다. 그때 내가 소속한 부서에서는 대형버스에 각종첨단장비를 탑재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측정기기 교정(較正)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강원도 지역이었다. 대화전화국에 버스를 정차시키고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업무를 6시에 끝내고 저녁을 먹은 다음 숙소인 모텔로 들어가 고스돕을 쳤다. 밤 10시쯤 도스돕을 마무리하고 시내로 나가 허름한 술집에서 동료가 딴 돈으로 술을 마셨다.
나는 기력이 약해서인지 네 명이 고스돕을 치면 피박, 광박을 예외 없이 맞았다. 그리고 가끔 옆에 사람 돈까지 물어주는 돕박 까지 크게 맞을 때는 한달 출장비의 반을 5일 만에 날린 때도 있었다. 고민은 깊어만 갔다. 돈도 돈이지만 내가 엉뚱한 패를 내서 고스돕에 참여한 동료에게 황당한 피해 즉 민폐 가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매일 잃다보니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루 편한 날 이 없어서 생각해낸 것이 죽는 것 아니면 광을 파는 것이었는데, 동료들은 연속 죽는 연사(連死)는 못한다는 제도를 만들어 점점 더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궁지에서 탈출할 뾰족한 방법이 없자 주말에 집으로 돌아오면 《고스돕 완전정복》등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또한 혼자서 패를 깔고 연습하면서 복수를 다짐하며 칼을 갈았다. 그러나 고스돕 실력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은 내가 안 치겠다고 하면 학습비용은 반드시 실력으로 돌아오고 투자비는 언젠가는 회수된다는 사탕발림을 하였다. 더욱이 고스돕은 세 명보다는 네 명이 해야 재미가 있기에 빠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도 특별히 그 시간에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남들이 하는 것을 보기만 하고 고리를 뜯거나 끝나고 나서 술을 얻어먹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보통 고통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계산하고 수를 읽으려 하였지만 패만 들면 주눅이 들고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앞으로 2개월 지옥 같은 저녁이 그려지자 명분이 있는 돌파구가 절실했다.
독 안에든 쥐 모양 고스돕에 갇혀 벗어나지 못한 어느날 동료 K가 쓰리고를 부르고 신이 났다.
“잘 봐 계산할 테니, 피 12장이지, 그럼 3점부터 센다. 자 똥 석장 시작 할 때 흔들었지! 쓰리고 에 피박에 광박 13*2*2*2*2= 208점 상한가. 돈 앞으로 ”
나는 자즈러 졌다. 그 다음 날부터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었다. 혀만 바짝바짝 타들어 가서 물만 마셔댔다. 그런데 죽으란 법을 없었다. 어느 날 업무가 끝나갈 무렵 대화 전화국장이 우리에게 고생한다며 저녁을 사주겠다고 나섰다. 우리를 데리고 간곳이 봉평에 있는 ‘봉평보신탕’ 집이었다. 그 집은 스포츠신문에도 소개된 전국최고의 맛 집이라고 하였다. 70대 후반의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주인이었다. 할머니는 50년 전 도시에서 결혼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20대 신랑이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 봉평으로 무작정 들어왔으며, 신랑에게 먹이려고 시작한 보신탕이 전국에 알려졌다고 한다. 맛이 진하고 담백했다.
보신탕을 맛본 후 어린 시절 겨울 몸이 약하다고 어머니가 묵처럼 얼린 보신탕을 화롯불에 데워 주었고. 그것을 먹으면 기운을 차린 기억이 떠올랐다. 회복이 덜 된 몸도 보호하고 고tm돕에서도 벗어날 겸 일주일에 한두번 일과가 끝나면 대화에서 버스를 타고 30Km 시간으로는 40분 걸리는 봉평으로 가서 보신탕을 먹고 고수돕이 끝날 때쯤 대화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봉평행, 처음 몇 주는 보신탕 맛으로 갔고 그 다음은 중학교 때 읽은 이효석 작품을 만나겠다는 야릇한 열기로 봉평을 찾게 되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은 자연과 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한묶음 으로 처리하는 심미(審美)적인 작품으로 특히 서정적 문체에 휘몰아가는 문장 이었다. 대화행 밤 9시 30분 막차를 타고 오는 길, 눈앞에 소금을 뿌린 듯한 하얀 메밀밭이 펼쳐지고 허생원과 동이가 나귀를 몰고 대화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들과 같이 대화로 가고 있었다. 그때 나도 언젠가 이효석 작품 같은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각종모임에서 고스돕을 칠 때마다 대화에서의 절규와 봉평에서 구원을 주었던 37세에 결핵뇌막염으로 요절한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생각했다. 그 영향으로 1997년 회사에서 열린 K문학상에 도전, 단편소설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듬해 1998년 9월 9일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효석 묘지 이장을 막는 봉평 주민들을 피해 야음을 틈타 파주로 이장”나는 이효석의 묘지가 왜 내 고향 파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일에 쫒겨 가며 살았던 나는 이효석 묘지의 파주 이장건을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명예 퇴직후 1년을 놀고 나서 2011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배우려고 문화센터에 수강신청을 하였다. 강의 첫날 갑자기 일이 생겨 수업이 끝나갈 무렵 강의실에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강의는 파장인 것 같았다. 반 총무인 듯 한분이 보온병과 봉지 커피 그리고 종이컵을 보자기에 싸고 있었고, 수강생들은 책과 노트를 가방에 넣고 있었다. 칠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칠판 맨 위 “강사 이상우 전명지대 문창과 교수” 라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늘 수업한 내용인 이효석의 문학작품〈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구조 설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교수가 이야기했다.
“참고로 봉평에는 이효석 묘지가 없으며 묘지는 파주에 있습니다.”
오후 1시가 넘도록 강의가 이어지자 다른 강의가 예정되어 있는지 문밖이 시끄러워졌다. 밖의 소란으로 궁금증을 일으키는 묘지에 대한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교수가 앞장서고 그 옆에 총무가 붙어서 걸었다. 나는 총무 바로 옆과 아래의 대각선으로 걸어갔다. 총무가 강의시간에 궁금했는지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이효석 묘지가 왜 연고도 없는 파주로 오게 되었어요”
“이야기가 좀 긴데 내 스승인 작년에 돌아가신 서울대 문과대학장과 한국수필문학 진흥회장을 지낸 이응백 교수 그분이 유족과 협의해서 묘지를 이응백 교수 고향인 파주로 모셔온 것 같아”
나는 귀를 쫑긋이 세웠다. 총무가 이응백 교수하고 유족이 무슨 사이 인가를 물었다. 또한 강원도와 평창군에서 이효석 묘지를 파주로 이전하게 놓아둔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였다. 이에 교수의 설명은 이효석 묘지는 영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장평IC부근 용평면 장평리 선산에 있었는데 영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유족에게 이장하라고 하였으며, 처음에는 유족들이 고속도로 아래로 힘들게 이장을 하였는데 몇 년 지나고 고속도로가 확장된다고 또다시 유가족에게 토지를 구해서 옮기라 하였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장 통보를 받은 생활이 넉넉지 않은 유족들이 분통이 터졌고 이효석 문학을 좋아하는 문인 중에서 유족과도 평소 친분이 있던 이응백 교수한테 하소연 하였으며, 이응백 교수는 이효석 아버님 고향이 함경도니까 파주에 실향민 묘지를 알선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총무와 교수는 이응백 교수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총무가 화제를 돌렸다.
“작년 이응백 교수님 돌아 가셨을 때 상가에서 아드님 뵈었는데 글 쪽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아들 하나인데 이름은 이선중 이고 아마 사업을 한다는군”
교수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자네가 이번에 수강 신청한 이우중 인가?“
“예 그렇습니다. ”
“음 그래…… 고향은 어디인가?”
“예 파주입니다.”
“파주라! 이응백 교수도 파주인데……”
“예 집안 어른이세요.”
“……”
그 후 나는 글을 쓸 때 이효석의 서정적이며, 심미적인 글을 흉내 내곤 하였다. 내가 발표한 「오찬교도들이나」「대단한 대결」「산에는 사람이 산다」등이 대표적이라면 대표적 이랄 수 있다.
2014년 11월 3일이었다. 문화센터 강의가 끝나고, 식당으로 가면서 교수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효석이 다시 봉평으로 갔어.”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교수님! 그게 정말이에요 5월에 봉평에 가보았는데 묘지가 없던데요.”
“평창군에서 그 동안의 일을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이효석 묘지를 파주에서 봉평으로 이장 하였네.”
“예 다시 돌아갔군요.”
“하늘에 계신 이응백 교수가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고향으로 갔으니 어쩌면 잘 된지도 모르지.”
나와 교수는 경쾌하게 식당으로 올라갔다.
나는 고스돕으로 인해서 이효석 고향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또한 그의 작품을 흉내 내고 결국에는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내 생각에 억지가 있지만, 내가 이효석 고향을 다녀간 답례로 이효석은 내 고향 파주에 16년 동안 머물렀다. 나는 고스돕을 칠 때 마다 다짐 한다. 이효석 처럼 자연과 인간의 소통 그리고 심미적이며 휘몰아가는 문장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나는 고스돕이 좋다. 똥 석장 들어오면 더욱 좋다. 똥 석장이 들어오면, 흔들고 흔들면 따블이다. 점수는 광1점에 쌍피4점을 보태면 5점 그리고 따블이니까 도합 10점이다.
2015년 한국산문 5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