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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된 아이    
글쓴이 : 소지연    15-05-28 19:44    조회 : 6,757

                                                                 어른이 된 아이

                                                                                                         소지연

  아이들이 떠나간 빈방, 가만히 귀를 대면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옛 시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그다지 웃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 그들에게 자상하기에 앞서 먼저 근엄했었는지 모른다. 부모란 그렇게 그들과의 추억을 안고 가는 존재이다.

  보통 엄마인 나는, 멀리 있는 아들을 만나 예전에 못다 한 웃음을 터뜨려 보리라 마음먹는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지난 봄, 그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착륙준비를 시작하자 문득 아들과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졸업식 전날 그는 학우들과 스승님들 앞에서 차분하게 스피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유독 한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나는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려 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씩씩한 말을 더 기대했던 나는 그만 어린아이라는 말에 걸려버렸다. 어려운 객지로 학창생활을 떠날 사람이 약한 마음을 보이다니! 도무지 상황에 맞지 않는 말만 같아서, 소감을 묻는 그에게 딱딱한 얼굴만 보였다. 지금에 와서야 내 옹졸함을 돌아보게 된 것은, ‘등에 업은 아이에게 배워서 여울을 건넌다.’는 속담마저 그때 나를 비껴갔기 때문이리라.

  어느새 그가 지아비이자 아비의 모습을 띠고 서 있다. 튼실해진 그를 보는 순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예전 그 어린아이가 궁금해진다. 지난 시절 사임당 식 용기와 참을성을 가르치느라, 여린 마음을 내 보였을 때 선뜻 보듬어 주거나,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었을 때 파안(破顔)의 웃음을 터뜨려 준 적이 별로 없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쉴 새 없이 입이 벌어진다. 이제 아들에게서 그 옛날의 어린 아이를 다시 보고 싶은데, 벌써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 한다.

  “늦게 본 첫손주이니 예쁘고 예쁠 겁니다. 그래도 너무 티를 내지는 마세요!” 오래전에 손주 보는 수업을 마친 한 친구의 직설적인 충고에 그럴 자신이 없던 나는 마지못해 끄덕였었다. 평소 감정 관리를 잘하는 남편은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아이를 보자 단박에 허물어져버린 그와 나는 얼마 전의 어른들이 아니었다. 첫 돌을 기다리는 아이가 아직은 너무 조그마해서 우리는 그만 한 살배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온갖 몸짓과 소리로 어르고 설치는 우리의 놀이에 아들 며느리도 한패가 되었다. 며느리는 아예 시아버지 옆에 주저앉아 번갈아가며 아이를 얼러 댔다. 둘이만 남게 되었을 때 나는 친구가 들려 준 충고를 생각하며, “이제부터 우리 좀 어른답게 해 보아요!” 짐짓 점잖은 척을 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부산한 손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웃고 찡그릴 기회도 주지 않고 쉴 사이 없이 얼러대는 우리가 제 눈에도 한참 철없어 보였나 보다. 저녁밥을 먹일 때였을 것이다. 음식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조급한 엄마 아빠가 숟가락을 들이대자, 조그만 얼굴에 위엄을 가득 담고 책망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기운이 빠진 그들에게 아이는 잠시 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깜짝 윙크를 보냈다. 그야말로 부모는 아이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된 장면이었다. 우리도 다독여주지 못했을 아들내외의 어린아이를 한 살배기 손녀가 어루만지고 있었을까. 아득히 먼 옛날, 아들과 씨름하며 밥을 먹이던 그 날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아오기 며칠 전, 곁에서 놀던 손녀를 침대에서 떨어트렸을 때의 일이다. 정작 세게 울어야 할 아이보다 내 놀란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나 보다. 황급히 달려온 아들은 이리저리 살피더니 아무 일 없다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도 금세 다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마 위에는 사탕만한 혹이 불거지고 눈두덩이 불쑥하게 솟아올랐다. 남편이 그때의 우리 둘을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 나는 한순간 놀랐다. 사고를 한바탕 치르고 난 내 얼굴은 돌쟁이만 같은데, 그 곁에 눈 가장자리가 까맣게 멍이 든 한 살배기가 어른 같은 미소를 흘리고 있지 않는가.

  실수투성이가 된 마지막 며칠 동안, 돌발 사고의 후유증에 대처하는 아들과, 아픈 것도 금 새 잊고 방긋 웃는 손녀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 나는 그제야 알아 볼 수 있었다. 솜사탕 같은 딸아이의 상처가 아린데도 내색 하지 않는 아들이 실은 옛날에 한 어린아이였었다는 사실을. 돌쟁이 손녀의 천연덕스러움이 신비롭기 그지없던, 그 날에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시간은 언제 그만큼 흘렀을까. 햇살 좋은 카페에 마주 앉아,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과 그때의 어린아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는데, 머뭇거리다 어느 새 떠나와야 할 날이다.

  다시금 돌아온 호젓한 내 집에서 기적 같았던 그 시간들을 돌아본다. 아들과 손녀가 다음에는 어떤 어른스러움으로 우리를 맞이할지, 궁금한 그 미래를 아껴두고 싶다. 어른이 된 아이와 더불어 한번 흐드러지게 어린아이가 되어 본, 특별한 휴가가 저만치 가고 있다. 아들이 남겨놓은 몇 가지 소지품에서 쇠비름 같은 어른 냄새를 맡는다. 손녀야말로 오래 오래 아이로 남아 있어도 좋으리라.

    월간 순국(殉國 ),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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