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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양수리    
글쓴이 : 봉혜선    23-12-07 22:10    조회 : 2,570

꿈꾸는 양수리

 

가을은 하늘에 달리고 땅에 구른다. 붉어지는 감과 무게에 휘청이는 모과가 연초록빛으로 눈에 감겨든다. 산에는 몰래 숨은 밤이 늘어나고 하루가 다르게 서두르는 대추의 색 속에서 가을이 옷을 갈아입는다. 사과와 배외에 밤과 대추만이 고유의 과일이라던 이론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바라본다. 카멜레온처럼 부끄러움 없이 색을 바꾸는 가을은 자랑스러운 듯하다.

가장 하고 싶은 건 긴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거는 일이다. 날마다 이불을 내다걸어 햇빛으로 가득 부풀릴 것이다. 바람에 이불이 춤을 추는 동안 표고버섯을 말릴 것이다. 고추도 빨갛게 익혀 하늘에 대고 자랑스레 늘어놓겠다. 토란대와 갓 캐낸 양파의 흙도 말릴 것이다. 김과 가죽 잎에 찹쌀풀을 발라 널어놓을 것이다.

양지 바른 쪽에 심어둔 나무 밑에 의자들을 늘어놓겠다. 빨간 벽돌담을 길게 쌓아놓고 벽돌로 둥그렇게 자리를 만들어 불놀이를 할 수 있는 터를 지닐 것이다. 등나무 꽃 아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꾸미고 그릇들을 내오는 길에는 수세미와 박이 달려있을 것이다. 고라니는 못 들어오게 토마토로 벽을 만들고 여지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릴 수 있게 물 가까이 심어야지.

또 나무들을 심을 건데, 양수리에 땅을 장만하고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대추나무다. 대추나무는 잎이 늦게야 돋는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들이 꽃 잔치, 신록의 잎 잔치를 치르고 난 후에도 대추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다림이 있은 다음에야 크는 늦된 자식처럼 대기만성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늦가을까지 반짝임을 잃지 않는 대추나무의 자태는 판도라의 상자에 남긴 희망과도 같아서 늙어가는 중에도 나무를 심으리라는 꿈을 키우는 요즘의 나를 위무한다. 손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으리라. 나무를 심는 것은 당대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감나무는 오덕(五德)을 지녔다고 선비의 나무라 했다. 옛사람들이 이르는 말을 따라볼 것이다.

애국자인 양 무궁화를 입구 제일 앞에 세웠다. 무궁화는 꽃이 성글고 잎은 구멍이 숭숭 뚫렸다. 한여름 지치고 목마른 벌레들에게 양분을 내주어 숭고한 상태가 되었다. 연한 꽃잎 색은 바래지 않고 여름 내내 아침이면 새롭게 열린다. 무궁화는 나라꽃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준다. 가지 끝에만 꽃을 매단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희망의 빛이다.

상수리나무에서는 걸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열매가 떨어진다. 마치 복을, 건강을, 그 외에 다른 좋은 것들을 우수수 내려주는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돌아서지 않게 한다. 복숭아꽃의 계절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 색감은 여간해서는 닮은 것을 찾을 수 없다. 모과꽃 색의 옷을 찾느라 애썼던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자연을 닮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애를 쓰지만 다만 복제할 뿐 자연스럽지않기가 일쑤이다. 주말마다 찾아드는 곳에서 서울살이에서는, 사람살이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혜택을 많이 받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늘도 구석도 가리지 않고 피어오르는 생명력을 배우는 자연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반 지하에 운동 기구를 10개쯤 갖다놓고 그 중 거꾸리에 제일 많이 매달려 있겠다. 그래서 비가 오면 무릎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프다는 친구를 불러 거꾸로 누워 거꾸로 된 세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운동할 때는 운동을 해야 하므로 그대로 잠들 수 있도록 침묵을 지켜야 하리라. 마음 맞는 친구와의 동침은 달콤하리라.

무언가를 만지고 궁리하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아파트 작은 방에 딸린 베란다를 직접 확장해 방을 넓혔다. 한 달간 문을 닫고 개조해낸 남편의 작품은 서툴렀지만 뿌듯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장난감이 집이면 어떠랴, 거실과 방 하나의 바닥을 본드풀없이 마루로 새로 까는 것도 해냈다. 벽지 위에 칠도 직접 했다. 자신이 생긴 남편의 로망으로 마련한 곳이 양수리 작은 땅이다. 매일 무엇인가를 그리고 주문하고 택배 왔느냐 묻는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도구의 동물이 인간이라는 말처럼 호미와 삽으로 시작한 지 10년여 동안 연장 가게 부럽지 않을 만큼 자꾸 사들이는 연장들은 자연을 이용하기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턱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기역자는 알아도 낫을 찾지 못하던 나의 낫질도 나날이 향상되어가고 있다. 연장만 팔아도 3년은 먹고 살 거라는 내 진심어린 농담도 둘 사이에서 말거리가 되고 공식 언어가 되어갔다. 연장을 전시할 큼지막한 창고를 마련해야 하리라. 꿈을 구체화시키는 도구로 선택한 양수리가 더없는 풍요를 주고 있다.

느리게 살기가 자연스러워지는 인생의 가을 시기를 맞아들이고 있다. 남편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며 접한 외면하기 힘든 유혹을 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슬금슬금 넘어간 나의 희망과 대응은 이렇다.

너른 방 하나는 꼭 비워두겠다. 그 빈 방에 앉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만족하리라. 무엇보다도 의자들을 많이 갖다놓으려고 한다. 자연 어디나 방이며 의자이다. 볕이 드는 의자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행복하리라. 빈 의자에 자주 앉아야 하는 늙은 육신으로도 나는 행복하리라.

땅은 죽음을 초월하고 생명을 이해한다.’ 는 중국 속담이 떠오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누가 그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구름 닮은 꿈을 꾸리라. 가을은 독서하기에도 살림하기에도 너무 찬란한 때이다. 매 주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는 양수리다. 양수리는 꿈을 꾼다.

<<토포필리아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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