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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의 봄    
글쓴이 : 유시경    12-07-08 00:30    조회 : 5,080

오빠의 봄
 
 여고생이 되자 내 몸과 가슴 곳곳에도 사춘기와 저항기가 친구처럼 찾아왔다. 집안에 들어설 때마다 느껴지는 암울한 콘크리트 바닥과, 냄새나는 방구들과, 연탄재로 막혀버린 부엌아궁이가 새로움에 대한 희망을 자꾸만 억누르고 있었다. 대학생활에 여념이 없는 오빠, 늘 붉은 얼굴빛의 아버지. 내 사춘기가 극도로 우울하고 예민했던 까닭은 아마도 칙칙하고 썰렁한 공간뿐이던 집안 분위기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수건은 아무 데나 던져져 있었고 양은대야 속에 며칠씩 묵혀둔 빨랫감에서는 생선 썩는 내가 풍겼다. 얼어붙은 수도꼭지, 곰팡이 꽃핀 찬장, 눌어붙은 밥알들. 나는 정말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에게 날개가 있다면 여물지 않은 이 꽃잎을 싣고 저 멀리 날아가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프시케를 날라다 준 것처럼 파란 바람이 나를 안고 외딴 정원으로 달아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에 사로잡혔다. 시골에서 올라와 홀로 자취를 하는 몇몇 아이들의 생활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던 초봄 어느 날, 좀 논다는 친구 한 명이 넌지시 다가왔다. 동네에 아는 오빠가 있는데 소개해주겠다는 거였다. “너처럼 얌전한(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이에게 못된 사람을 소개해줄 수 없다.” 며 그 애는 연신 나를 유혹하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익살스러운 눈빛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는 그 아이로부터 꽤 괜찮은 ‘착한 오빠’ 한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는 서울 모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중이라 했다. 전역을 한 뒤엔 다시 ㅎ대학교 행정학과에 복학하여 경관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편지가 두어 번 오고 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펜팔을 하는 것이야말로 비밀스런 연애방법 가운데 최고의 묘미였다. 미지의 남자에게, 꽃무늬 편지지 위에 소녀의 핏빛 가슴을 채우는 낭만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멋진 일이었으랴.
 편지를 쓰는 내내 나는 마치 <<키다리아저씨>>의 주디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절대 알지 못할 아주 멋지고 중요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흥분되었다. 세상의 바람이 온통 파랑이고 제피로스였다. 저비스 씨의 기다란 그림자처럼, 가깝고도 먼 곳에 미지의 왕자가 있어 이 어린 소녀를 보호해준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멋진 경찰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었을 그 오빠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스피커에서 내 이름자가 또렷이 호명되고 있었다. 학생부로 당장 내려오라는 학생과 주임선생님의 호출이 떨어졌다. 나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은 하얀 편지봉투를 손으로 흔들며, “대체 이 안에 있는 오빠가 누구냐?” 고 물으셨다. 뜯어진 그 편지를 죄인처럼 받아들었다. 얌전한 필체로 촘촘하게 주저리주저리 쓰인 글귀들을 읽어 내려갔다. 군인아저씨의 편지처럼, 또 언제나 그랬듯이(다행스럽게도) 주로 평범한 안부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시더니 다시 한번 질문하였다.
 “어라, 이것 보게? 빨리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이 오빠란 사람이 누구지?”

 -ㅇ월ㅇ일 오빠가-

 침착해야만 했다. 마지막 줄의 ‘오빠가-’라는 문구를 발견한 나는 금세 내 혈육인 친오빠를 생각해냈다.
 “아하, 이거 있잖아요. 제 오빠한테서 온 편지예요. 오빠가 지금 서울에 있거든요. 잘 있냐는 안부편지네요, 히이.” 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오빠가 서울의 어느 경찰서에서 의무경찰로 근무 중이라고 하였다.
 놀라운 거짓말. 주임선생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이내 편지봉투를 건네주셨다. 순진한 내 오빠들 덕에 비행소녀로 낙인찍힐 한순간을 쉬 모면할 수 있었던 나는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 다짜고짜 면박을 주었다. 대놓고 학교로 편지를 보내면 어떡하느냐고 쏘아붙였다. 다시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겠다며, 없었던 일로 하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표정이 굳어진 아이는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한마디 내뱉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가슴이 터져버릴 듯한 하루가 한소끔씩 끓어오르는 풋바람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 뒤 오전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자취를 하던 친구가 나를 슬며시 복도로 불러내었다. 오빠, 그 오빠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 애를 통해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던 의경 오빠가 미지의 여고생 얼굴 한번 보자고 기어이 와서는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순간 당황하였다. 고백건대 나는 전혀 모범생이 아니었고 집안도 보잘것없이 가난했으므로 그를 만나기가 망설여졌다. 나를 보면 필시 실망할 거라 생각했다. 친구에게 절대 교실 문을 나설 수 없으니 얼렁뚱땅 둘러대서 돌려보내라 하였다. 무슨 다 큰 남자가 여학교를 다 찾아오느냐고, 그러면 내 입장은 뭐가 되느냐며 붉으락푸르락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친구는 이후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기의 동네오빠를 어렵사리 소개해준 내게 그녀는 모종의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이상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경찰오빠가 학교로 찾아온 그 날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어느 부잣집 담장 위로 촘촘히 박아놓은 유리조각들처럼 교정의 잔디가 봄 햇살에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위태롭게 걷는 걸 좋아해서 때로 까치발을 하고 담 위의 날카로움을 손끝으로 음미하며 지나다녔다. 가끔씩 담장 밑 틈바구니에서 노란 민들레나 하얀 냉이꽃이 피어올라왔다. 채 벌어지지 않은 냉이꽃대를 꺾어들고, 울퉁불퉁한 담벼락을 훑으며 햇살을 먹는 것만큼이나 사랑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문학과에 들어간 오빠 때문에 우리 집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와 갈등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사상적 대립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나는 정말 사상이 뭔지 모르는 꿈 많은 여고생이었을 뿐.
 글쟁이가 되려고 국문과에 들어갔냐며 아버지는 노상 오빠를 다그쳤다. 하나뿐인 아들의 책들을 부엌 시멘트 바닥에 죄 쌓아놓고 불을 붙이는 아버지의 눈자위에서 내가 읽은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 말 없이, 책이 타오르는 것을 본 오빠는 그대로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즈음 학교 주변에서는 대학생들이 경찰에 맞서 매일같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아궁이 뒤편짝에서 몇 개의 화염병을 발견한 아버지는 오빠의 멱살을 쥐다가 또 몇 번이나 까무러치셨다. 영문도 모르던 나는 오빠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오빠는 푸르러야 할 대학생활을 어둡게 꾸려갔다. 커다란 집 담장 위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박혀있어도 그 벽 틈에선 늘 작은 꽃들이 피어났다. 봄은 여지없이 따스했고 나는 담벼락 아래 핀 꽃다지처럼 조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여전히 회색빛의 소용돌이였다. 개다리소반 위로 피어나는 기운은 음식냄새라기보다 차라리 어둠의 제전에 놓인 향불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오빠는 말이 없었고 아버지와의 숨 막히는 긴장감은 날이 갈수록 사그라질 줄 몰랐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소녀와 처녀 사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현실이 꿈이길, 또한 내가 꿈꾸는 모든 공상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오빠는 삼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는 그러나 전공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제삿날, 조카들의 방을 들여다봤을 때 삼면이 온통 노랗고 분홍빛깔인 서적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세 아이에게 동화와 위인전을 읽어주며, 담장 밑에 핀 키 작은 봄꽃의 일가처럼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제멋대로 피어났다가, 어느 사이 사그라지고 마는 불꽃의 한살이와도 같았던 오빠의 봄날이 안쓰럽다. 의경의 임무를 완수했을 또 다른 그 오빠는 지금쯤 어느 자리에 앉아있을까. 교정까지 찾아온 자신을 매정하게 돌려보내고 만 얄미운 여학생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혹여 고달픈 행정업무 때문에 느지막이 업종을 변경하지는 않았을지.
 스치는 봄바람이라 했던가. 서리 같은 바람이 이리도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마도 내 가슴팍의 추억들이 어느 벌판에서 아질한 꽃 몸살에 젖는 탓이리라. 바람을 향해 춤추고 싶은 불꽃의 의지는 간 데 없고 그저 바람을 따르는 흔들림이 되어버린 오빠들의 봄이 간다. 마흔을 훌쩍 넘어선 내 몸의 기억, 그 기억의 봄은 아직 열일곱을 넘지 못하고.
 
 -2011년 한국산문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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