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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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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날이여 안녕    
글쓴이 : 노정애    12-09-03 13:27    조회 : 5,824
지난 날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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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문정(본명 노정애)
 
K는 온종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오페라 티켓 4. 드디어 오늘이었다. 아내에게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서 가겠다는 전화를 하며 패밀리 레스토랑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고등학교시절 음악시간.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면 그날의 곡에 대한 감상 포인트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조용히만 있으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 음악을 자장가 삼아 잠으로 피곤을 풀거나 모자란 공부를 하는 자유 시간쯤으로 여겼다. 하루하루 살기에 벅찬 가정 형편을 가진 그에게 명곡 감상이라는 또 다른 신세계를 선생님이 선물했다. 평소 팝송을 흥얼거리거나 가요를 잘 뽑는 아버지 덕분에 성인가요도 흉내 낼 수 있었지만 명곡의 깊이는 달았다. 일주일에 한번. 모차르트, 베토벤, 차이콥스키를 만나고 푸치니를 만나는 그 시간은 그에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큰 금액을 지불할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이제 40대 후반, 중견회사에서 안정된 지위에 올랐고 먹고사는 것에 대한 걱정에서 겨우 벗어났다. 가난을 유산으로 주신 부모님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꽤 근사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티켓을 예매하고 아이들에게 학창시절 음악 선생님처럼 오늘 볼 오페라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CD를 틀어주기도 했다.
공연장에 식구들과 함께 들어섰다. 연인, 친구, 모임에서 왔는지 점잖은 부인네들이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팜플랫을 들여다보며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가 전투를 치르듯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많은 이들은 생활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지 모든 행동들은 익숙하게만 보였다.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 중학교 2학년인 작은아이와 세월 가는 것도 즐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낙천주의적인 아내와 그들의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갔다.
좌석에 앉았다. 앞에서 4번째 중간으로 가장 좋은 자리다. 무대에 있는 배우들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것 같았다. 평일 저녁 좌석은 빈 곳이 없었다. 기름진 저녁으로 든든해진 배를 향이 좋은 뜨거운 커피로 달래고 팜플랫에 오늘 나올 공연자를 보며 감상할 준비를 끝냈다. 드디어 <라 트라비아타> 막이 올랐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프랑스의 문호 알렉상드르 뒤바 피스(Alexandre Dumas fils, 1824727- 18951127)1848년에 쓴 소설 동백꽃 부인원작 오페라로 일본에서 소설이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춘희(椿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희곡으로 각색된 이 소설의 연극을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0101901127)가 파리에서 보고 만든 오페라로 약4주 만에 전곡을 완성했다. 파리 사교계의 여왕 비올레타는 젊은 귀족 청년 알프레도를 만나 동거를 시작하지만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폐병으로 그 남자의 품에서 죽는 슬픈 이야기다.
1막을 시작하며 축배의 노래가 나오자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보고 있다. 이 자리까지 오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오래전 그는 혼자서 이 공연을 보았었다. 사랑했던 그녀가 떠나고 난 뒤였다. 가난한 복학생인 그와 공주처럼 귀하게 자란 재력가의 딸인 그녀와의 이별은 만남에서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떠나버린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없이 원망하며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학교 게시판에 붙은 <춘희> 포스터를 보면서 그녀가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했던 공연이었다. 혼자라도 보고 싶었다. 일주일 점심을 먹지 않고 모은 돈으로 손에 쥐어진 티켓은 2층 끝자리 구석.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무대 위의 주인공들. 그러나 노래만은 바로 옆에서 종이라도 치듯 가슴에 커다랗게 울리며 박혔다.
3막이 오르고 비올레타가 폐병이 악화돼 의사는 하녀에게 몇 시간 밖에 못 살 것이라는 말을 한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 아버지 제르몽의 편지를 읽는다. 알프레도가 그녀의 희생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을 것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녀는 이미 때는 늦었다고 탄식한다. 행복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비올레타가 절규하듯 애잔하게 부르는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
 
안녕, 지나가 버린 날들의 행복한 꿈이여/나의 뺨의 장미들은 이미 빛을 잃고/심지어 알프레도의 사랑도 저물어 가네/나의 약해진 정신을 위로하고/ 오 지친 영혼을 받쳐주고 위로하고/ 신이여 이 여인을 용서하고 당신의 것으로 받아주소서/아 모든 것이 끝입니다.//기쁨도 슬픔도 이제 곧 끝이나고/무덤은 모든 인간을 마무리 짓는다/눈물도 꽃도 내 무덤엔 없을 것이다/ 나의 뼈를 덮어줄 새겨 넣을 이름도 없네/오 지친 영혼을 받쳐주고, 위로하고/신이여 이 여인을 용서하고 당신의 것으로 받아주소서/ 아 모든 것이 끝입니다.
순간 후두둑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는 공연이 끝나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애잔한 그 노래는 그녀를 보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떠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그는 더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언젠가 울지 않고 이 공연을 보고 싶었다.
2층 끝자리에서 지금의 앞자리로 오는데 20년이 걸렸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꿈만 같았다.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첨단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책 읽기며 새로운 정보수집과 공부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성실이 지나쳐 마누라는 일중독이 아니냐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돈도, 빽도 없으며 건강한 몸뚱이 하나로 세상을 사는데 남한테 사기 안치고 몹쓸 짓 안하고 살려면 무식하게 성실해야만 했다. 세상이라는 정글에서 사자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달려야하는 가젤처럼.
2막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이들은 졸고 있었다. 학교에서 온종일 앉아있던 피로는 든든히 먹은 저녁과 조용한 음악들이 더해져 졸음을 쏟아 부었다. 엄마가 깨웠지만 그도 잠시 명곡보다는 피로가 먼저였다. 그의 눈치를 살피는 집사람을 못 본척했다. 이 시간만은 그냥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3막이 오르고 그를 울렸던 노래를 비올레타가 부른다. 절규하듯 애원하듯 세상을 떠남을 아쉬워하며 모든 것은 체념하듯 애절하게 부른다. 가슴이 먹먹해 졌다. 와락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눈물을 삼켰다. 그때처럼 마음껏 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옆을 보았다.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 아내와 함께 무대를 보고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잠시 자리에 앉아 먹먹해진 가슴을 달랬다.
주차시킨 차를 찾으러 나오면서 공연에 대해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빠가 울었다는 곡에서 눈물은 안 나왔으며 좋았다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는 반쯤 졸면서 본 아이들을 구박하며 이 돈이면 낡은 세탁기를 바꿀 수도 있었다고 그를 흘겼다. 배고픔과 절심함, 추억 없이 듣는 노래는 그저 CD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다를 바가 없나보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이런 공연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을 기억해주어도 다행이리라. 그의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아픔들도 지난 날이여 안녕과 함께 이별을 고했다. 들뜬 마음으로 보냈던 K의 하루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한국산문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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