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낮에 잠깐 성당에 들렀더니 구유가 마련되어 있었다.
2011년 우리 성당 구유의 컨셉은 가난한 6, 70년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린 시절, 때가 탄 회색 시멘트 기둥의 그 전봇대에서 밤새 길을 밝혀주는 향수의 그 외등이 동방박사와 함께 성탄 구유를 비추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덮여있고 낡은 도배지가 덕지덕지 붙여진 벽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이 걸려있다. 대문 앞에 쌓인 하얀 연탄재, 전봇대에 붙은 광고 전단들, 희끄무레한 60초 백열등 작은 방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꿈같은 나의 크리스마스가 그 구유에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우리 집은 참 가난했었다. 우리가 살던 집에는 마당은커녕, 작은 집에 네 가구가 빼곡히 모여 살았다. 날마다 학교에서는 에너지 절전, 혼식, 쥐잡기 운동등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들이 행해졌다. 아마도 우리 집뿐 아니라, 온 나라 전체가 가난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식구가 여덟인데도 방은 두 칸만 쓰고 있었고 전등은 하나였다. 작은 문을 사이에 두고 그 벽에 구멍을 내어 형광등 하나를 길게 끼워 쓰느라 늘 집은 희미했다.흐린 빛 아래서 엄마는 뜨거운 주전자의 김으로 낡은 스웨터의 털실을 풀고 우리는 동네 만화방에서 빌려 온 만화를 읽었다.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만 자자! 불 끈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하고 사정했지만, 어느새, 두 방의 불이 꺼졌다. 읽던 책을 덮고 잠을 청하노라면 바깥 외등 불이 희미하게 방을 비추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불빛 아래서 혼자 공상의 나래를 펴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전기세, 물세를 아낄 만큼 가난하다는 것을 그때야 느꼈다. 누구나 가난했을 시대이니 수제비를 먹고 국수를 끓여 먹었어도 서럽지 않았지만 밝은 불 아래서 만화 한번 실컷 읽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여름에는 반딧불로 겨울에는 하얀 눈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옛 성현들의 이야기가 말 그대로 실감이 났다.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되어 크고 밝은 집에서 살아야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조각보의 꿈이 하나씩 가슴속에 새겨져 갔다.
재일 작가 김학영의 소설 『외등이 없는 집』의 첫 장면에는 주인공 켄(健)이 퇴근하면서 멀리 있는 자신의 집을 보며 쓸쓸해한다. 평소라면 안도의 숨을 쉬며 마음이 안온해졌을 외등의 불빛이 그날 따라 꺼져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 것이다. 따뜻한 저녁밥이 차려져 있어야 할 방에는 이불만 하나 달랑 깔려 있고 집안은 정적만이 감돈다. 벽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태우며 그는 전날 아내와 싸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재일(在日)’이라는 그의 내면의 외로운 고백이 외등과 오버랩되어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새김 된다.『외등이 없는 집』이라는 그 제목에서 소설의 분위기는 고독하게 비춰진다. 외등이라는 이미지의 조합이 따뜻함과 기다림을 갖고 있듯, 불 꺼진 빈집에서의 주인공의 모습은 쓸쓸하게 비친다.
‘외등’은 소설이나 드라마의 소재로 늘 등장한다. 가난한 육, 칠십 년대의 밤의 배경에서 외등은 반드시 등장했다.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며 외등 아래서 서성이는 누나의 모습이며, 짝사랑하는 여자의 집 앞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그녀의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가난한 대학생의 모습이 연상되는 외등은 낭만적인 만큼 또 얼마나 쓸쓸한가. 그래서 뮤지컬이나 영화에는 그 외등이 꼭 등장한다. 문명의 발전으로 이제는 외등이 아닌 따뜻한 차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대가 되었고 낭만적으로 비치던 외등은 이제는 기다림이 아니라 단순한 귀갓길의 안전장치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 외등이 성탄의 구유에 쏟아진다. 가난한 그 시대의 구유였다면 어쩌면 아기 예수님의 포대기는 비단 포대기가 아니라 군데군데 기워진 까만 솜이불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성탄절 교회 종소리, 특별한 성탄절을 기대하며 아버지를 기다렸던 그 시대 가장의 어깨는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학교를 짓느라 집을 자주 비웠던 아버지는 며칠에 한 번씩 꺼칠꺼칠한 수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밤늦게 아버지는 두 손 가득 군고구마나 빵을 안고 들어오셔서 잠자는 우리를 깨우고 정신없이 자다가 아버지의 두툼한 손바닥의 한기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졸면서도 이내 없어질세라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며 먹었다.
초등학교 2학년 성탄절, 친구를 따라 처음 교회를 가 보았다. 삐걱거리는 교회 마루에서 몇 명이 모여 성탄절 연극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금색, 은색 반짝이 무늬로 장식한 성탄 트리를 보며 성탄절이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처음 그곳을 따라가 낯선 사람들의 친절을 받으며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평소에는 인식하지도 못하던 외로움을 성탄절 날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엘 가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몰래 몇 번 가던 교회도 이내 그만두었다. 달콤한 빵의 유혹도 아버지의 권위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해 성탄절 저녁, 문방구에서 산타 그림을 사와 벽에 붙이고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불쑥 아버지가 큰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들어오셨다. “선물이다! 자, 하나씩 골라봐라!”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갑자기 정신이 든 우리는 모두 아버지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보따리에는 스웨터며 바지, 장갑 등이 종류별로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신이 나서 자기가 좋아하는 색의 옷을 골라잡았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역시 크리스마스의 특별함을 아시고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추운 겨울밤, 갑자기 모든 것이 따뜻해졌다. 바깥 외등 아래 구석진 곳에 모아둔 하얀 연탄재의 쓸쓸함이 금세 풍성하게 느껴졌다. 시장 한 모퉁이에서 전을 펴서 팔고 있던 어떤 아주머니의 보따리를 아버지는 그대로 다 사오셨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사 준 옷을 머리맡에 개어 두고 잤다. 하얀 아이보리색에 작은 꽃들이 박혀있는 스웨터와 코르덴바지에서 풍기는 석유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하던 그날 밤, 바깥 외등 불빛이 그날처럼 따뜻한 적은 없었다.
2011년 성탄 구유에서 갑자기 잊어버린 1970년의 성탄절이 되살아난다.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늘 가로놓여 있었던 미묘한 균열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일에 바빠 가정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도 좋은 가장이 되려고 어지간히 노력하셨던 것 같다.
외등을 보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 그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가 작은 성탄 구유에 담겨 있다. 이런 나의 기억을 팔순이 되어 가는 아버지께 들려 드리면 아버지는 좋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다.
“내가 빵점짜리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라고... (20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