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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겨진 종이배    
글쓴이 : 조헌    13-01-12 22:20    조회 : 5,438
 
구겨진 종이배

                                                                       조      헌

 “차라리 내가 죽고 쟤 어미가 살아야 할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요.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소! 나마저 죽고 나면 저 아인 어떻게 될지 그저 눈앞이 깜깜할 뿐이라우.”
 여든 세 살의 할머니는 피를 토하듯 깊은 숨을 내 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옆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오디처럼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할머니를 바라보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손자가 있었다. 난 짠한 마음에 번지는 눈물을 훔치며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가했던 추석연휴기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 <멜로 다큐 가족>이라는 제목이 우선 내 관심을 끌었다. 모름지기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가족을 소개하고 그 곡진한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구성하여 감동을 주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절절한 그 가족의 사연은 보면 볼수록 안쓰러워 마치 훑어내듯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전라도 남원의 어느 산골마을. 어렵사리 혼자 지내는 할머니에게 갑자기 어린 손자가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소년은 지방을 떠돌며 막일을 하는 아빠, 그리고 유방암으로 투병하는 엄마와 함께 경기도 성남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6년 전에 이미 한 차례 암 수술을 받았던 엄마가 불행히도 재발되어 말기 판정과 함께 1개월 정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다. 온몸이 붓고 통증이 심해 병원에서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엄마가 더 이상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불가피하게 이곳으로 보내진 거였다.
 유난히 까만 눈에 해맑은 표정을 지닌 작은 소년! 방송제작자는 어리지만 산골생활에 적응하며 할머니와 꿋꿋이 생활하는 기특한 소년에게 초점을 맞춰 나름 감동스럽게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내내 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젊은 엄마의 한 맺힌 슬픔과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저 무기력하기만 한 가난한 가장의 절망,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눈물로 받아들이며 입술을 깨무는 할머니의 아픈 심정에 마음이 쓰여 몇 번이나 손수건을 찾아 들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 후반부로 접어 들 무렵, 네 사람의 만남이 주선되었다. 이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 자리가 있기 하루 전, 각자의 모습을 요모조모 찍느라 카메라는 바삐 움직였다.
 아들에게 줄 마지막 편지를 병상에 누워 힘겹게 쓰고 있는 엄마는 두어 글자를 쓰고는 멈추고 다시 안간힘을 다해 한 두 줄을 쓰곤 또 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영원한 이별을 연습하고 있었고, 텅 빈 공사장 숙소에서 속수무책 멍한 표정으로 밤을 하얗게 밝히는 아빠의 참담한 눈이 화면 전체를 메우기도 했다.
 한편 산골에서는 내일 손자를 데리고 며느리가 있는 병원을 찾아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할머니의 느린 몸놀림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천근만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입고갈 옷과 가방을 손수 챙기고는 방바닥에 앉아 무엇을 열심히 접고 있었다. 종이배였다. 병든 엄마에게 아무 것도 가져다 줄 것이 없는 소년이 생각해 낸 선물이었다. 설익은 손으로 접는 종이배는 볼품은 없었지만 색깔은 고왔다. 색색가지 종이로 열심히 접은 종이배를 가방에 곱게 넣고는 잠이 든 소년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오히려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두 모자(母子)의 상봉은 각기 달랐다. 할머니와 아빠의 만남은 침묵이었고, 엄마와 소년의 만남은 눈물이었다. 두 볼을 어루만지며 소년을 꼭 껴안은 엄마의 두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병원비 때문에 축 처진 아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 때, 소년은 불현듯 가방을 뒤져 준비해온 종이배를 꺼냈다. 버스에서 눌려서인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소년은 종이배를 매만져 엄마에게 주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선물!” 모양이 많이 헝클어진 작은 종이배는 핏기 없는 엄마 손에 올려졌고 소년은 엄마의 등 뒤로 수줍은 듯 몸을 숨겼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굳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삶의 속살은 왜 이리도 매몰차단 말인가? 살아있음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한 고통 앞에 내 몰린 이 가족의 안타까운 모습에 자꾸만 진저리가 쳐졌다. 그들을 한없이 수척하게 만드는 가난과 무자비하게 할퀴는 절망. 비극의 늪에 빠져 미처 내지르지 못하는 비명소리가 연신 들리는 듯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이 세상을 가리켜 ‘불난 집(火宅)’ 또는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실존적 고통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한시도 근심과 슬픔, 고통과 번뇌를 내려놓을 수 없으니 가위 화택이요 고해가 아닐 수 없다.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병든 엄마와 아내 그리고 며느리를 병실에 놓고 아빠는 일터로 향하고 할머니와 소년은 산골로 돌아오며 방송은 끝이 났다. 옛날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에 ‘사느라고 애쓴다! 참말 애쓴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들은 과연 얼마나 더 애를 써야 하는 것인지.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배가 그 가족을 싣고 어디론가 맥없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어렸다.
 인간세상을 가리키는 ‘사바세계’라는 말의 뜻이 ‘겨우 참고 견딜 만한 곳’이라는 것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며 절이도록 아픈 맘을 추슬러본다.
 
* 계간 《수필춘추》2012 겨울호에 게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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