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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먼 길    
글쓴이 : 강혜란    13-03-06 22:18    조회 : 4,850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먼 길
                                                                                                                            강 혜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지혜롭거나 이지적인 성품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바다를 좋아했다. 내게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마주 대할 때마다 수평선 너머의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열망에 들끓었다. 바다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 때면 나는 하릴 없이 바닷가에서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의 빛깔은 사시사철 달랐다.
  내게 봄 바다 색깔은 에메랄드빛(연초록)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 안은 물결이 굽이치며 아득히 펼쳐진 바다에서는 봄의 약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만선을 바라며 그물과 장비를 부지런히 챙기는 어부들의 투박한 손과 갯바람에 그을린 얼굴, 거센 파도를 가르며 조기잡이를 떠나는 소형 어선들의 위태로운 곡예, 갈퀴질로 갯벌의 낙지와 조개를 캐는 아낙네들, 벌렸다 닫았다 입질을 거듭 하며 천천히 뻘 흙을 토해내는 통 속의 조개들 등이 내가 기억하는 봄 바다의 이미지들이다. 생활의 현장이면서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는 봄 바다.
  십대에 나는 봄철만 되면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들떠 어디든 떠나고 싶은 일탈 충동에 자주 시달렸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다를 즐겨 찾았다. 가슴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바다를 보며 목청껏 외쳤다. 산발한 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내 모습에 바다는 입 크게 벌려 깔깔 웃어주었다.
  여름 바다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낮의 바다는 낭만과 열정으로 출렁거렸다. 백사장에는 피서객들로 북적였다. 수영복을 입고 늘씬한 몸매를 과시하는 여인들, 윈드서핑을 즐기는 남자들, 얼굴만 남기고 온몸을 모래에 묻고 모래찜질을 하는 사람들, 튜브를 타고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아이들 등으로 바다는 몸살을 앓아댔다.
  젊은 시절, 여름 바다는 나를 충동질해대곤 하였다.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더러 나도 비키니를 입고 홍옥처럼 붉은 관능을 과시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야누스의 형상을 한 여름 바다. 어제의 표정을 지우고 바다는 갑자기 표변하여 격정으로 포효하며 들끓어 해일을 몰아오기도 하고 내륙 쪽으로 폭풍을 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바다가 무섭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 내 젊음의 질풍노도를 저 바다가 대신 표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혈육처럼 친근감마저 들 정도였다. 바다를 통해 나는 내 안의 격정을 읽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내 가을의 바다는 깊고 푸른빛으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해수욕장을 떠난 사람들의 해변 가는 한적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빛바랜 파라솔들이 을씨년스럽게 백사장 구석에 쓰러져 있고 소금기 배인 축축한 바람에 실린 비릿한 내음이 코끝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제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을 바다를 찾았다. 젊은 날에서 멀어졌다는 상실감을 달래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가을 바다를 맛으로 표현한다면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 맛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바다는 내게 피난처이자 휴식처 역할을 해주었다. 타자와의 틀에 박힌 관계망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바닷가를 거닐며 몽상에 젖어 보기도 했다. 까닭 없이 우울한 날이면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꿈꾸는 불경을 저지르기도 했다.
  내 나이 이제 지천명. 이 나이에 이르니 바다에 대한 취향도 달라지는가 보다. 나는 이제 봄바다의 약동 혹은 여름바다의 격정 혹은 가을바다의 고적보다 겨울바다의 순수가 더 좋아졌다.
  겨울의 바다는 투명하고 맑다. 거대하게 지구를 비치는 명징한 거울 같다. 인적 드문 백사장은 고요 속에 잠기고 생각난 듯 개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찢는다. 잔잔한 바다의 물결은 거대한 한 장의 푸른 도화지 같다.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는 김남조 시인의 시 <겨울바다>가 떠오른다. 그렇다. 세월에 의해 다져진 삶의 의지를 제 세월 속에 기둥으로 세울 때가 내게도 온 것이다.
  삼십 년 전 일이다.
  여고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입시철만 되면 가슴앓이를 했었다. 회사 일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을 할 때, 단짝 친구들인 경숙이와 필녀가 겨울 바다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우리 일행은 1박 2일 일정으로 대천해수욕장으로 떠났다. 서울을 떠난 지 다섯 시간 만에 대천에 도착했다. 바닷가 가까운 곳에 민박을 정한 뒤, 친구들과 해변 가를 거닐었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물었다 뱉었다. 한기가 몸 속을 파고들었다. 산책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뒤로한 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방안에서도 파도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친구들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내게도 잔을 건넸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단숨에 마셔 버렸다. 취기로 얼굴이 빨개졌다. 잠시 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마신 게 화근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방 밖으로 급히 데리고 나갔다. 토악질은 계속되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멀리 밤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엔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 차가운 달빛이 바다로 흘러 내렸다. 파도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 절벽에 부서졌다.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귀를 적시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그 날의, 겨울 밤바다를 잊을 수가 없었다.
  거듭 밝히지만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나는 반어적으로 읽는다. 나는 내 자신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툴러 상처도 많이 받고, 삶의 끈을 내려놓고 싶은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든 뒤로 인생의 고비 때마다 나는 겨울바다를 찾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고 맑고 투명한 겨울바다에 내 자신을 비쳐 보았다. 바다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나는 바다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소리가 아닌, 내 안 저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겨울 바다 앞에서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맑고 투명한 겨울 바다 앞에서 지난날들을 떠올려 본다. 내가 나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제 내 여생은 내가 나로 되돌아가는 길에 바쳐져야 하리라. 겨울 바다도 오냐, 그렇다고 잔 포말을 내 쪽으로 몰아주며 고개 끄덕여준다.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이재무, 시, <먼 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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