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잦았던 지난여름, 난 졸업 논문쓰기와 두 달을 병원에 계셨던 친정엄마의 간병을 병행하면서 하루하루를 외줄타기하듯 버티고 있었다. 휴학, 복학을 반복하면서 처음 지녔던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시들해졌다. 하지만 올해 안에 어떻게 하든 졸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논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더위가 막 시작된 유월에 접어들자 그동안 위험한 순간을 수차례 넘기면서도 용케 체력을 유지하시던 친정엄마가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급실로 간다는 언니의 다급한 호출을 받고 새벽길에 줄달음쳐 갔었다. 응급실 상황은 항상 보호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엄마는 물도 넘기기 어려워하셨다. 하지만 나는 가슴만 졸일 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힘들게 병실을 배정받은 엄마에게는 꼬박 두 달간의 병상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예민한 성격이신지라 엄마는 간병인도 못 미더워 하셨다. 자연 간병은 딸들 몫이 됐다. 그러나 딸 다섯 중 언니 둘은 해외에 살고 있는 형편이라 비록 엄마의 병세가 위중 지경이라 하더라도 그 일 때문에 바로 귀국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로 위 언니와 내가 간병을 떠맡아야 했다.
격일로 밤을 새워 간병해야 하는 고달픈 날이 계속 됐다.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거부하는 엄마를 끼니때마다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으며 가까스로 시중을 들고 나면 전쟁을 치르고 난 느낌이었다. 밤낮이 바뀐 탓인지 엄마는 신경이 더욱 가팔라져 걸핏하면 딸들 이름을 불러대며 아이처럼 보채곤 하셨다. 그런 엄마를 간병하느라 밤을 새는 일이 잦았다. 당연히 잠이 모자라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이 연속될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논문은 커녕 당장 코앞에 닥친 기말시험부터가 큰 걱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좀 준비해 두었을 텐데 때 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지만 이제와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논문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슬슬 초조감이 더해 갔다. 다른 묘안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내년에 다시 도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올해 안에 꼭 졸업하고 싶었는데. 논문에 대한 강박으로 갈팡질팡 며칠을 고민했다. 엄마의 상태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상태가 좋아졌다 싶어서 안도하면 ‘밤새 안녕’ 이라고 새벽에는 또 다시 검사 수치가 곤두박질치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곤 하였던 것이다. 엄마를 위해서는 기말시험도 논문도 깨끗이 포기하고 간병에만 매달려야 하겠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무슨 방법이라도 찾으라고 성화였다.
결국 난 성화의 편을 따르기로 했다. 이왕 독하게 맘먹은 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치 말자 스스로 다독이며 다음날부터 노트북과 함께 병원에 출근을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식후 30분 약 드리고, 용변 상태 확인하고, TV를 틀어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엄마를 위해 볼륨을 높이면 일차적인 준비가 완료되었다. 잠깐 엄마가 TV에 열중하시는 틈을 타서 노트북을 열고 작업할 준비를 했다. 병원의 온갖 잡음과 소음 수준의 TV소리, 낮은 조도의 조명이 힘들게 했지만 난 비장한 집중력으로 한 자 한 자 논문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간간히 바이탈 체크하러 들어오는 간호사와 청소 아줌마의 의혹에 찬 눈길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그들의 반응에 신경 쓸 힘도 여유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병실 창문 밖에 스멀스멀 어둠이 고여 올 때쯤이면, 환자의 안정을 위해 처방 해준 수면제로 주무시길 간절히 기대해 보았지만 내 속셈을 간파한 듯 엄마는 어떡하든 잠들지 않으려 애를 쓰시는 것 같았다. 어린애 다루듯 어르고 달래도 보지만 미동도 않으시니 하는 수 없이 불을 꺼버리고는 노트북을 열고 논문 쓰는 일에 열중하는 일상이 되풀이 됐다.
엄마는 기력이 급격히 떨어져 혼미하신 중에도 내 행동을 주시하고 계셨는가 보았다. 나중에 언니한테 전해 들으니 간병에는 소홀한 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나를 꽤나 원망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밤새워 작업한 내용을 집에 와서 다시 손질하는 동안 초복도 중복도 지나 여름은 막바지로 치달아 갔지만 엄마는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주치의는 마침내 엄마의 연세를 들먹이며 퇴원을 권유했다. 병원을 나온 엄마는 언니가 마련한 새 환자용 침대에 누워서 거동도 못하시고 지내셔야 했다.
한시름 놓은 나는 논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논문 접수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몸과 마음이 분주한 일주일을 보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 눈을 감았다. 달콤한 허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난 그 감정을 오래 음미 할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이었다. 눈을 감으신 채로 갑자기 성가(聖歌)를 부르시는 엄마의 상태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언니는 거의 울고 있었다. 친정에 가는 내내 뭔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는 우려와는 달리 비교적 온화한 표정으로 당번날도 아닌데 웬일이냐며 의아해 하셨다. 내가 어찌 된 일인가 어리둥절하니 언니는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증세가 조금씩 회복되었다며 계면쩍게 웃었다. 엄마 보고 싶어 한 달음에 달려 왔는데 반가워도 안 한다고 일부러 투정도 부려 보았다. 그날 밤 잠결에 나를 몇 번이나 애타게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었지만 늘 있던 일이라 괘념치 않았는데 지금 떠올려 보니 엄마는 내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딸들과의 시간을 보내시고는 다음 날 아침 물 한 수저 달게 드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아버지 곁에 엄마를 모셔두고 온 날 밤,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잠을 한 숨도 이룰 수 없었다.
엄마와의 소중한 시간과 바꾼 논문이 우려와는 달리 무사히 통과됐다. 모니터의 합격이라는 글자가 갑자기 내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그 글자 뒤에 엄마의 그림자가 설핏 비치는 환영을 보았다. 이제 엄마 가신 지 넉 달이 되간다.
나는 이 논문을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싶다. 왜 그렇게 홀대 했느냐 나무라실 만도 한데 꿈에도 오시지 않는 걸 보면 하늘나라에서 이미 내가 한일을 너그러이 용서 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