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날리는 태극기
오길순
초등학교 시절의 등굣길을 떠올리면 가슴이 용솟음친다. 구릿빛 장병들이 힘차게 부르던 군가 ‘휘날리는 태극기‘가 들려올 것만 같다. 땀과 흙으로 얼룩진 장정들의 열기는 태양처럼 뜨거웠다. 몇 십 킬로 배낭을 짊어진 군인들이 수백 명씩 줄지어 구보할 때면 내 마음도 깃대에 꽂힌 깃발처럼 펄럭였다.
야트막한 4킬로미터 황토 야산 등교 길은 늘 군가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솔숲으로 무성하지만 5,60년 전 그 곳에는 군용 토담 벙커가 마을을 이룰 정도였다. 아침마다 벙커에서 후줄근한 군복에 소총을 메고 행군하는 군인들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졌다. 지붕도 없는 벙커 속에서 밤새 불침번을 섰는지 이슬이 함북 배어있었다.
등교 길은 늘 군화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말발굽처럼 달리는 청년들의 기상에 내 마음도 씩씩해지곤 했다. 적진을 향한 듯 날카로운 눈빛은 늘 하나로 뭉쳐진 것 같았다. 그래서 모교인 황화 초등학교는 포탄과 군가가 지켜주는 평화의 벙커처럼 여겨졌다.
그날도 장병들 얼굴에서 상처가 많이 보였다. 군복도 헤져있었다. 각개전투장 철조망을 드나든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각개전투장의 해골그림 이정표는 평화의 약속처럼 든든했다. 해골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하늘 높이 걸린 밧줄을 건너는 유격훈련병들의 모습은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군부대 기상나팔 소리는 인근의 새벽을 깨웠다. 더불어 멀리 농촌마을도 아침잠을 깼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와도 교회당 종소리처럼 아련히 울려오는 나팔소리는 애수가 어려 있었다. 시계처럼 정확한 그 음악소리에 들녘도 조용히 일을 시작했다.
나는 작은 몸집에 무거운 책보자기도 힘든 줄 몰랐다. 하얀 이와 눈동자만 번쩍이는 얼굴로 행군하는 카키색 군인들의 군가 때문이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온 책보를 추어올리며 노래 말 듣기에 골몰했다. 덕분에 군가를 많이 외운 아이로 자랐다. 오르간 한 번 눌러 본 적 없는 친구들도 그 때 음악공부를 했던 듯 모두가 가수처럼 노래를 잘 한다.
특히 시선 멀리 군가를 부르는 군인들을 보면 마음이 애틋해졌다. 두고 온 부모 형제가 떠오르는가. 구름 너머 연인 혹은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픈 걸까? 이제 팔십대가 넘었을 그 분들이 국가를 지켜낸 긍지는 남다를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음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휘날리는 태극기’를 연주했다. 오르간으로 듣는 군가는 또 다른 떨림을 주었다. 정확한 가사와 음정에 내 눈도 초롱초롱해졌다. 며칠 후, 선생님은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가 입대한 훈련소로 위문면회를 갔다. 선생님이 연병장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눌 때 ‘휘날리는 태극기’를 합창하는 우리는 가슴이 벅찼다.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면회를 온 듯 북적이는 연병장에서 부른 군가는 두고두고 뭉클한 기억으로 남았다.
자매부대인 제2훈련소 군악대가 여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열예닐곱 살 여고생들은 연주에 매료되었다. 청년들의 몸짓 하나, 악기 하나마다 함성을 질렀다. 교내 고적대만 보았을 뿐, 그토록 멋진 남성들의 연주를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마침내 ‘휘날리는 태극기’로 마무리할 때는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라도 꽂은 듯 소녀들 함성이 멎지 않았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타지에서 고향학교로 돌아왔을 때였다. 가을 운동회에서 5,6학년 여학생들과 소고놀이 하는 스물 두어 살 여선생이 고와보였나 보았다. 고향이 아니었으면 끊임없이 보내오는 인근부대 장교의 편지에 답장을 했을지도 모른다. 황토에 얼룩진 카키색 제복은 어린 날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때문이다.
이제 그 옛날 단발머리 소녀는 주름 깊은 할머니가 되어 등굣길에서 듣던 ‘휘날리는 태극기’를 홀로 조용히 불러본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 우리들의 표상이다// 힘차게 약진하는 /우리대한민국이다// 너도 나도 손을 잡고/ 광명으로 보전하자// 나가자 청년아 /민족번영에// 힘차게 울리어라 /평화의 종을// 우리는 백의민족/ 단군의 자손.
(마음의 양식 <<행복의 나라로>> 2018.3.23. 국방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