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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쿠마 씨 (2020.11월 한국산문 특집)    
글쓴이 : 김주선    20-10-29 14:15    조회 : 9,781

가을, 누군가에게 쓰고 싶은 편지

                                             친애하는 쿠마씨 

                                                                                                                        김 주 선 

  마음 까지 읽어주는 번역기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당신이 열어보지 않는 메일이지만 이 가을에 편지를 씁니다.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당신이 찍어 준 사진들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습니다. 도메인 공원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나를 세우고 자꾸 웃으라고 재촉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진 속의 나는 세상 다 산 여자처럼 보이지만, 뒤쪽에 서 있는 천년의 은행나무는 너무나 곱고 아름답습니다

붉은악마가 열광했던 해였습니다. 치열했던 3년간의 싸움은 5분 만에 협의로 끝이 났습니다. 살림을 나누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각자의 짐을 챙기고 나니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혼자 방에 남았습니다.

틈틈이 삼성동 이민박람회를 다녔습니다. 전문 컨설턴트의 설명회에 참석했지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친구의 초청에 응했습니다. 유학을 갔다가 현지인 남자를 만나 눌러앉은 당찬 애였고 인형 같은 예쁜 딸이 둘 있습니다. 친구는 투자나 취업이민보다 이국의 남자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반은 농담처럼 들었습니다. 남자라는 족속의 바람기에 신물이 난 사람에게 달콤한 사랑이란 게 남아있기는 했을까요?. 월드컵 4강에서 독일에 패한 소식을 접한 다음 날 뉴질랜드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습니다. 8월경, 가을 같은 겨울 나라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친구 부부가 마중을 나왔고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습니다.

외곽 도로변 모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여러 동의 빌라가 모여 단지를 이룬 숙소였지요. 모텔의 개념이 한국이랑 전혀 달랐습니다. 주방과 세탁실 등 살림살이가 완비된 15평 규모의 주택이었습니다. 친구 집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서둘러 적응하고 싶었나 봅니다.

첫날은 친구 부부와 저녁을 먹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현지 조사에 나섰습니다. 퀸스트리트 중심가에 한 평 정도의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고 해 친구랑 보러 갔습니다. 오후 5시쯤 되었을까. 대낮처럼 해가 쨍쨍한데 하나둘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습니다. 한국의 거리와는 완전 딴판이었지요. 전날은 미처 몰랐던 풍경과 낯선 땅에 삶을 풀어놓아야 하는 게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천혜 자연의 아름다운 뉴질랜드에서 살아보기라는 이민박람회의 광고와 전혀 다른 황량한 분위기에 그날 밤 잠들지 못했습니다

쿠마씨, 당신을 처음 만난 건 유학과 이민을 돕는 친구 미애의 사무실에서였지요. 오클랜드에 도착하고 사흘째 되던 날, 온 김에 여행이나 하라며 가이드 겸 택시기사인 당신을 소개했습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까무잡잡한 키 작은 노인이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내가 어지간히 성가셨던지 친구는 당신의 하루를 100$에 빌려 나를 짐짝처럼 떠맡긴 것이었죠. 인도계 남자, 나이는 70, 이름은 쿠마, 아는 한국어는 생활단어 몇 개 정도. 생면부지인 쿠마씨의 프로필을 알려줬지만 낯선 땅에서의 두려움이 너무 커 망설였더니 당신이 아버지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당신은 오클랜드 시내에서 서쪽으로 30분쯤 달려 영화 <피아노>의 촬영지인 카레카레 비치에 나를 데려다주었습니다. 세일링을 마친 윈드서퍼와 물새의 발자국뿐, 변변한 카페조차 없는 인적이 드문 곳에 피아노처럼 버려진 기분이었습니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안내표지판 하나 없는 스산한 해변에서 내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검은 모래밭에 집채만 한 파도가 와 덮쳤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 바위가 거친 숨을 헐떡거릴 적마다 바다는 진흙이 가득한 해변에 안개를 뱉어놓았습니다. 바람이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그 낯선 해변에서, 맨발로 선 내 시린 발등을 파도는 쉼 없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저 멀리 나의 신발 곁에서 손을 흔드는 당신이 보였습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영화 팸플릿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칸이 황금종려상으로 보답했던 영화 <피아노>의 음산한 선율과 섹슈얼한 광기가 느껴졌습니다. 홀리 헌터와 그녀의 어린 딸을 연기한 안나 파킨과 그리고 피아노가 놓인 그 자리에 나를 세우고 또 웃어보라 시늉을 했습니다. 사진 속의 나는 세찬 바람에 머리채를 뜯기는 불쌍한 여자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화 속 에이다처럼 말문을 닫아버린 동양 여인에게 당신의 손짓, 발짓, 그리고 몸짓은 충분한 언어였습니다

여전히 굳은 표정에 근심 보따리를 짊어진 내가 안쓰러웠던지 돌아오는 길, 해양 박물관 앞에 차를 세우고 어린애 달래듯 남극 펭귄을 보여주었지요?. 온통 내 마음은 한국에 두고 온 딸아이와 앞으로 살아갈 걱정뿐이었습니다. 가이드로 최선을 다하는 당신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전쟁기념관 앞에서 찍은 사진은 패잔병 같았습니다. 그나마 노을이 지는 원트리힐에서 바라본 오클랜드 시내와 사화산 분화구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던 양 떼는 마음의 위로였습니다.

당신의 택시 안에 준비된 카세트테이프는 늘어질 대로 늘어졌지만, 낯익은 멜로디는 얼마나 위안이었는지 모릅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한국에서 연가로 많이 알려진 번안곡이 뉴질랜드 민요인 줄 미처 몰랐지만, 그 덕분에 여행 마지막 날은 조금 웃었습니다. 말은 안 통하지만, 나의 불안한 눈빛과 풍랑의 바다로 향하는 내 발목을 잡아 준 어쩌면 인생의 가이드이기도 했습니다. 격랑 뒤에는 반드시 잔잔한 물결이 생긴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모래 위에 지은 삶을 허물고 나니 이렇게 단단해졌는데 말입니다.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친구에게 메일을 물어보았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메일주소에 적힌 아이디 ‘jazzpiano63’에 관해 물었다지요?. 피아노를 곧잘 치는 줄 아셨겠지만, 재즈는커녕 바이엘 상, 하권도 겨우 뗀 초보였습니다. 나의 이민계획과 이국에 대한 환상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쿠마씨가 내민 따뜻한 커피는 아직도 온기로 남았습니다

피아노를 통해 사랑의 구원을 얻은 에이다의 삶이 행복한 결말이듯이 저 또한 해피엔딩을 꿈꾸는 삶을 꾸렸습니다. 나에게 뉴질랜드란 바로 미스터 쿠마입니다. 그곳에 가게 된다면 가을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저의 사진을 부탁드리고 싶지만, 열어보지 않는 메일처럼 어쩌면 당신은 부재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역기가 오류 없이 제 마음을 잘 전달하기를 바라며 부디 천국으로 부치는 편지가 아니길 기도합니다.


                                                                                              2020.10 한국에서

                                                                                               jazzpiano63 드림


                                                                                                  (한국산문 11월 특집, 신작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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