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택시(I’m Taxi)
이용만
금년 여름 스웨덴에서 근무하는 딸을 만나보고 귀국하여 도심공항터미널에 도착했다. 커다란 트렁크 두 개 말고도 작은 트렁크도 두 개나 되니 택시 잡을 일이 걱정이었다. 배낭까지 멘 채 택시를 타기에는 턱없이 좁다. 비어있는 모범택시는 예약된 승객을 기다리는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택시기사도 내가 이미 호출했으려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 카카오 택시를 호출하면서 짐이 많다고 말하면 기사는 우리를 태울지 말지 갸웃거릴 것이다. 택시의 뒤 트렁크에는 LPG 가스통이 자리 잡고 있어 공간도 충분하지 않다. 스마트폰 앱으로 짐을 실어줄 만한 대형 택시를 찾아야 했다. 여행 내내 짐 줄이자던 내 투정을 듣기 싫어하던 아내가 딸과 통화를 하더니 ‘아임 택시(I’m Taxi)’라는 듣도 보도 못한 택시가 곧 올 것이라고 했다.
9인승 카니발이므로 짐을 싣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기사의 표정도 밝았다. ‘아임 택시’를 몰기 전에는 일반 택시를 몰았다고 했다. 장단점이 있지만 기사는 운전만 하면 되므로 만족한다고 했다. 야간이나 혼잡한 시간대 등을 알아서 택시요금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었다. 다만 선택의 여지없이 강제 배차되는 것과 승객과는 불필요한 말은 먼저 하지 않는 운행 규칙이 특이했다. 요금은 카드로 자동 결제되거나 도착지에서 지불할 수도 있었다. 사람과 함께 짐을 싣고 가는 용도에 적합해 보였다. 짐을 실었음에도 요금은 카카오 택시보다 저렴한 듯했다. 생각해 보니 예전의 용달차를 요즘 거리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아임 택시(I’m Taxi)’가 외국의 우버(Uber) 차량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해 물었다. 잘 모르겠다면서도 운전기사는 이 차로 이삿짐까지 날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삿짐을 빽빽이 싣고 가겠다는 자취생인 듯한 여성을 그는 군말 없이 태웠다고 했다. 딸 같은 여성의 경제사정을 생각하며 짐을 싣고 내리면서도 요금은 플랫폼에서 정한 금액만 받으면 되었다. 짐의 무게라든가 개수가 많고 적음은 플랫폼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용 후기 같은 별 다섯 개로 승객이 평가하도록 되어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Algorithm)이 일을 매끄럽게 이끈다. 알고리즘이란 컴퓨터가 따라 할 수 있도록 절차나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즘(~ism)이 붙으면 나만 숨이 막히는가? 코뮤니즘(Communism), 페미니즘(Feminism), 사디즘(Sadism), 레이시즘(Racism)… 특히 알고리즘(Algorithm)이란 말에는 수학공식과 프로그램 언어까지 더해져 듣는 순간 경기(驚氣)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알파고와 이세돌 프로 기사의 바둑 대결 때부터 알고리즘이라는 용어에 왠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무튼 플랫폼 알고리즘이 사용자요 의사 결정권자이며 감독자이므로 운전기사는 알고리즘에만 충실하면 되는 일이었다. 기사는 친절했지만 알고리즘을 의식한 친절인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내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배려’라고 느끼는 순간 반사적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 하는 부담이 없었다. 아마 그 기사도 알고리즘을 매개체로 하여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듯 보였다. 친절에 대한 보상으로 ‘별 다섯’ 만점 평가점수가 그에게 위로가 되겠지하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전에도 종종 걷기 앱(App)에서 이같은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깜박 두고 나온 스마트폰에 걸음 수가 기록되지 않아 서운했다. 실제로는 오늘의 걷기 목표를 채웠는데도 서운한 느낌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굳이 스마트폰을 휴대하려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기계라도 알아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세상이다. 인증 샷(Shot)도 매한가지 아닐까 싶었다.
스마트폰은 이미 똑똑한 기계를 훌쩍 넘어선 존재였다. 심지어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해 변화된 서로를 알아채지 못하는 친구보다 몇 배 나은 동반자가 되었다. 혹시 나는 기계만도 못한 친구가 되고 만 것은 아닌가. 스마트폰이 가져다주는 위로가 어느샌가 더 커진 모양이다. 스마트폰은 복잡한 감정의 흐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간혹 오작동되는 경우에도 전원을 껐다 켜는 것으로 대부분 해결된다. 세상살이가 ‘On-Off’일뿐 옳은 방향을 향하는지조차 구별할 틈도 없다.
며칠 전 플랫폼 노동자들이 뭉쳤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플랫폼이 사용자다. 사용자 책임 인정하라.”라며 시위를 벌였다. 어차피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사용자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으니 플랫폼 기업이 노동자의 쉴 권리 및 휴가와 최저임금 등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구체적으로는 ‘내 밥줄을 쥐고 있는 알고리즘’을 공개하도록 정부에 촉구하는 일이었다.
플랫폼 기업과 노동단체는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상대를 두고 해결책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나? 나의 관심사를 알아챈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중독된 나를 어떻게 구제할지 캄캄하다. 한 손아귀에 들어온 스마트폰이라는 괴물은 이미 내게서 떼어낼 수 없는 ‘오장 칠부’의 제일 중요한 장기처럼 되어 있다. 스마트한 녀석이 친구 겸 모르는 게 없는 스승처럼 다가와서는 24시간 꼭 붙어 다닌다. 그가 나의 가족과 친구마저 내 주변에서 몰아내고 있다. “아임 택시(I’m Taxi), 그런데 너는 누구지?(Who are you?)” 나는 바보라고 고백하기 싫어 하마터면 스마트폰이라고 말할 뻔했다.
『한국산문』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