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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원의 은인들    
글쓴이 : 오길순    25-01-01 09:47    조회 : 2,324

                                                           설원의 은인들

                                                                                                                          오길순

눈 쌓인 덕유산에 가고 싶다. 산맥 굽이 돌아 무주구천동 스키장에 내리고 싶다. 내 발부리를 붙잡고 내려온 스키강사의 그림자도 남아있겠지. 거북이처럼 넉장거리한 나를 벌거벗다시피 수영복만 입은 채 구해 준 분의 숨결도 떠돌겠지. 두 분이 아니었으면 30여 년 전 그날, 태양에 녹은 이카루스처럼 설원의 눈사람으로 잦아들었을지도 모른다.

40여 명 교직원이 덕유산으로 향한 것은 겨울 방학 연수차였다. 알프스 융프라우보다도 근사한 곳에서 생애 처음 스키를 타다니, 낙타를 타고 명사산을 오르려는 여행자처럼 설렜다. 꿈꾸던 일은 꼭 이루어진다던가. 여인네 엉덩이처럼 펑퍼짐해진 폭설 스키장 앞에서 용솟음치는 호기심을 다독였다.

스키의 역사는 BC3천 년 이전으로 짐작된다. 북유럽과 아시아 산악지방 등에서 수렵과 교통 등 생존 수단이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어로 얇은 판자를 부른 데서 유래된 스키는 동계스포츠의 꽃이 된 지 오래이다. 겨울마다 붐비는 스키장 소식은 세상 어떤 냉기도 훈기로 바꿀 듯 넉넉하고도 풍요로웠다.

여러분, 여선생님들도 리프트를 탑시다. 식당이 정상에 있습니다.”

15분 정도의 속성 연습 끝이었다. 인솔자 말씀을 경전인 양 따랐다, 훗날. 고난도 슬로프가 초보자들에게는 목숨을 건 삼천 고개였다며 후일담이 무성했다. 정상에서의 식사가 초보자를 위한 완주 전략인 줄 알았더라면 리프트에 오르지 않았을 일이기도 하다.

설원은 순결했다. 세상 어떤 수심도 마전 시킬 듯 눈부셨다. , 이래서 스키어들이 그리도 겨울을 기다리나 보았다. 지난했던 삶쯤 순백의 천사 같은 스키장이 순식간에 표백시켰다.

울 아부지 어쩌자고 이렇게 팔자 좋게 낳아주셨을꼬!”

그러게 말이지, 환상 설경이네.”

서로들 농담을 주고받으며 벅찬 마음을 다스렸다. 저 만년설 같은 설원에서 스키어가 되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얀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식사하는 건 또 얼마나 낭만적이랴!

웬걸. 스키장은 서슬이 퍼랬다. 미움질을 일삼는 여인네처럼 인정이 없었다. 새신랑 발바닥을 방망이질하려는 동네 청년들처럼 사정없었다. 혹한기 생존 훈련하는 초병이 그러할까? 오체투지로 겨우 입문식을 치르고는 흩어진 정신을 차렸다.

동료들은 잘도 내려갔다. 그들도 대부분 초보였지만 어린 날 썰매 실력인지 초고속으로 날아갔다. 실은 서슬 퍼런 스키장 위세에 타인을 돌볼 겨를이 없었을 일이다. 눈벼랑에 넘어지면 끝이라는 공포심이 초고속 질주로 다그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눈 위의 광녀처럼 나부댔다. 빙판의 발길질에 아찔했다. 무엇보다 리듬도 안 맞는 탭댄서 같은 나를 올려다볼 동료들 생각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벌러덩 넉장거리까지 했을 때는 지상까지 살아 돌아갈 자신이 사라졌다.

그때, 김경수씨가 다가왔다. 동행한 스키강사인 그는 나를 위해 다시 올라온 게 분명했다. 목 타는 사막의 대상에게 생명수 한 잔 들고 온 구세주인 듯 반가웠다. 이내 나의 두 앞부리를 모아 잡고는 엎드려 역주행할 때 과연 설원의 곡예사다웠다. 날렵하고도 치밀한 동작으로 붐비는 스키어들 틈새를 잘도 비집고 내려갔다.

그런데도 긴장이 역력했다. 자칫 연쇄 추돌이라도 하면 대형 사고는 뻔한 일, 아둔한 나를 끌고 전후좌우 살피는 그가 위험천만해 보였다. 조난자를 업고 가듯 지쳐가는 그에게 결국 간곡히 부탁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혼자 타 볼께요.”

삼천 고개에서 붙잡아 준 고마움을 어찌 잊으랴! 넉장거리한 나를 일으켜준 구세주를 어찌 원망하랴! 문득 대답도 없이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에 미안함이 사무쳤다.

지난여름 청소년 캠프 할 때 연습할걸.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슬로프에서 연습하던 스카우트 아이들과 함께 훈련해 둘걸. 유비무환만이 삶의 수호신인 걸, 왜 나는 늘 후회가 늦을까?

다행인 것은 그 너른 스키장이 텅 빈 일이다. 스키어들이 식사하러 갔는지 갑자기 그리되었다. 용기가 났다. 강사의 지도를 떠올리며 다리를 모으고는 너른 슬로프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텅 빈 그곳이 독이 될 줄이야. 지그재그로 내려가던 두 발이 스키장 펜스 아래로 미끄러졌다. 순식간이었다. 해안선에 빨리듯 밀려가는데도 하늘조차 외면했다. 수레바퀴 밑에 깔린 거북이처럼 요지부동, 봄이나 되어야 찾아질 공포에 질렸다.

그때, 꿈같은 광경이 눈에 띄었다. 저 산 아래에서 벌거벗다시피 노는 남녀들이 아련히 보였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그리 신비하게 놀았으리라. 이 겨울 수영복 차림으로 저리 평화롭다니, 그들을 향해 절로 외마디가 나왔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

듣는이 아무도 없는 듯하여 또 소리를 쳤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

“...”

, 이렇게 가는 거구나. 히말라야 설산에 빠진 알피니스트가 이리 고독했을까?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루스가 이리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어린 시절 얼음도 못 지쳤던 얼치기가 어쩌자고 눈길을 겁 없이 따라나섰을까? 덕유산 눈사람으로 잦아들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두고 온 가족들은 또 얼마나 애통할까?

그 순간 산밑에서 올라오는 이가 보였다. 드디어 천근 같은 내 부츠를 펜스 위로 밀어 올려줄 때 더욱 놀랐다. 그는 외투만 걸친 수영복 아담이었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애절했기에 벌거벗다시피 올라왔으랴! 부랴부랴 서둘렀을 그에게 차마 눈인사도 못 건넸다.

지상에 발이 닿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삼천 고개에서 살아온 게 꿈만 같았다. 아담이 아니었으면 하늘도 영영 외면했을 일이다. 온몸이 방망이로 맞은 듯 얼얼해도 고마움이 사무쳤다.

먼 훗날 김경수 씨와 친한 동료에게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 무주에서 김경수 씨 정말 감사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그래요? 그 사람 엄청 부자 되었어요.”

폐 일언, 그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아담도 꼭 그리되었기를 바랐다. 산 아래 리조트 노천탕이 에덴동산으로 보였나 보았다. 이제는 할아버지일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감사의 술 한 잔 높이 높이 올리고 싶다.

삼십여 년 전, 무주구천동 얼치기를 구해주신 설원의 구세주님들을 위하여!”

 

                      

                    『문예창작  2024년 겨울호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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