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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문득    
글쓴이 : 홍재운    12-10-04 18:40    조회 : 3,984
어느 날 문득
 
홍 재 운
 
가끔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에 한 시간, 아니 한 달에 하루쯤, 그런 날이 있다면 참 좋겠다. 내가 원하는 사람의 몸이 되어 살아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거기서 날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오늘 문학 강좌를 들으면서 문득 선생님과 내 몸이 바뀐다면, 그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문학지식과 감성을 모두 복사해 내 깊숙이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처럼 단번에 클릭, 쭈욱- 끌고 와 내 파일 깊숙이 숨겨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능수능란한 저 이야기보따리까지 몽땅 훔쳐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래 기꺼이 나는 염치없는 도둑이 되어도 좋겠다.
오늘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고 싶다. 성긴 흰머리를 흩날리며 감색티셔츠와 크림색바지를 입고, 그리스 하얀 담장에서 일 년 열두 달 지지 않는 부켄베리아를 준비하여 정중히 그녀에게 데이트신청을 하고 싶다.
쉰도 되지 않아 혼자가 된 여자, 내 핸드폰에 당당히 1번을 차지한 여자, 남편과 산 세월보다 혼자되어 산 세월이 더 많은 여자, 일곱의 자식을 키운 여자, 나의 엄마에게 가서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아니 엄마의 애인이 되어주고 싶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조르바가 마침내 발견한 해방감으로 참 자유에 이르듯, 이제 자식의 짐을 덜어주고 엄마의 자유로운 하루를 찾아주고 싶다.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스튜요리를 먹고 그녀의 잔에 붉은 와인을 따르고 싶다. 석양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녀의 미소를 안고 싶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게 파고드는 해변의 모래 위에서 그녀와 함께 춤추고 싶다. 나는 조르바, 그녀는 나의 애인이 되어 밤새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내 품에 털어놓게 하고 제풀에 겨워 슬피 울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다렸다가, 소녀 같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안고 주름 속 깊은 슬픔을 한 꺼풀씩 벗겨주고 싶다. 그녀가 좋아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함께 별을 헤이고 싶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조르바가 되어 그리스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섬, 크레타에 가고 싶다. 크레타의 영원한 낭만소설이 되고 싶다.
가끔 아니 수시로 나는 갈 수 없는 그곳을 상상한다. 둥글둥글해지다가 갑자기 뾰족해지는 사춘기 아들의 세계를 상상한다. 알다가도 모를 그 아이의 감성이 궁금하다. 갑자기 뾰족해진 순간, 그 녀석 안으로 들어가 사방으로 튀어나오는 뿔들의 실체를 보고 싶다. 그리하여 그 뿔의 방향이 어디인지, 얼마나 깊은지, 상처의 진앙이 어디인지 그 뿌리를 찾아 어루만져주고 싶다. 나도 모르게 밀어붙인 학원과 각종 규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그 아이 생각 반대편에서 무엇이 아이를 응시하고 있는지, 내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아이와 나의 생각이 다시 경청의 마음으로 바뀔까? 화합할 수 있을까? 할 수 만 있다면, 나는 아이의 책상에 흩어진 A4용지를 정리하듯, 서랍을 정돈하듯, 엉킨 아이의 머릿속을 말끔히 정돈해주고 싶다. 실망, 분노, 흥분에 적응할 수 있는 지혜를 그 아이가 찾고 있는 숨은 그림 속에 넣어두어야지. 분노가 때로 열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삶의 경이로움을 알게 하고, 아픔이나 슬픔까지 모두 지울 수 있는 시간의 지우개를 슬쩍 놓아두고 나와야지. 그렇게 잠깐, 나는 그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되어 아이보다 날카롭고 더,더,더, 갈라졌을지 모를 내 음성을, 내 모습을 거기서 바라봐야겠다. 어쩜 가슴 떨리게 두려운 나의 실체일지 모르지만, 탐험을 끝낸 아이의 몸에서 마주선 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누가 되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뚜렷하게 잡힐 것 같다가 순간 사라지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나는 가끔 구석진 소파 한 귀퉁이에서 홀로 길어졌다가 끈적해졌다가 속절없이 뾰족해지고 제멋대로 물렁해진다. 그렇게 나는 얇아졌다가 나를 떠나 가벼워지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책 속으로 들어간다. 가끔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가 서쪽 창에 걸릴 때, 하루가 또 속절없이 어두워질 때,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기가 되고 싶다. 유모차에 누워 내 눈동자를 올려다보던 그 까만 눈빛으로 들어가 유년의 순수함을 느끼고 싶다. 처음 마주친 사물이나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 처음 들었던 소리, 냄새, 그것들이 내게 던지는 순수한 물음의 첫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듣고, 보고, 읽고 싶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유모차에 누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흔들려보고 싶다. 블라인드를 흔드는 햇살처럼, 바람처럼.
나는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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