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의 활구(活句)와 선시(禪詩)의 세계
法門 박태원
벽암록은 최초의 공안 주석서이며 선종 문화의 총결산인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이다. 벽암록은 중국 송대 설두중현이 조당집, 전등록 등에서 공안 백개를 간택하여 송(頌, 詩)를 붙인 <頌古百則>을 원오극근이 평창(評昌)한 것이다. 벽암록은 원오의 제자인 대혜종고에 의하여 모든 판각과 잔본이 소각되었다가 190년 후 원나라 초기에 장명원 거사에 의하여 복간 되었다.
설두중현은 문학적인 활구(活句)를 구사하는 운문의 4세 법손이며 그의 <송고백칙>은 송고문학의 절정이다. 설두의 頌古는 분명한 선의 안목을 갖춘 웅대한 기상이 있고 풍부한 詩情으로 직관적인 예지가 번득이는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설두의 <송고백칙>을 정점으로 언어탐색을 통해서 선의 본질을 투득(投得)하려는 문자선(文字禪)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공안은 활구(活句)와 사구(死句)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사구는 문자의 개념풀이 만으로 충분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활구는 정식(情識), 사량(思量), 계교(計較)의 심의식으로 문자를 해석하여서는 그 참뜻을 투과할 수 없는 구절이다. 덕산연밀은 언어 안에 언어가 없는 것을 활구라고 하였다.(語中無語名爲活句) 활구는 언어의 궁극이며 우리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참나의 언어이다.
간화선은 공안 속의 활구인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수행법인 것이다. 선문답인 공안을 참구하는 요령은 “질문 안에 답이 있고, 답 속에 질문이 있음.(問在答處 答在門處-수산성념)”을 숙지하는 것이다. 벽암록에 수록되어 있는 공안의 활구와 선시(禪詩)인 頌古, 오도송(悟道頌), 공안시를 감상하고 참구해 나가면서 선(禪)의 세계에 들어가보자.
제1칙 무제가 달마에게 묻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핵심인가?’ 달마가 말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어서 성스러운 진리마저도 없다).” 무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한 자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불식(不識,모른다).”
[頌]
청풍이 두루했거늘 어딘들 극(極)이 아니리. 설두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자리에 조사(달마)가 있느냐?”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스스로 말했다. “있다.” 불러내어 노승의 발을 씻기리라.
[평창]
이 경지(‘모든 곳이 다 극’인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나귀라 불러야 옳은가, 말이라 불러야 옳은가, (아니면) 조사라 해야 옳은가? (도대체) 뭐라 호칭해야 하는가? 자, 말해보라. 어떻게 해야 설두의 의중을 간파할 수 있는가.
[해설]
궁극적인 존재는 有, 無, 非有非無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고 작용을 거두면 흔적도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는 이것을 선험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실체를 밝히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를 통해서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사람을 통해서 사람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며 참구를 하여 스스로 체득해야 알 수가 있다. 조주의 석교는 나귀도 지나가고 말도 지나간다.
제2칙 조주의 至道無難
조주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지도(至道, 최상의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揀擇, 취사선택)을 꺼릴 뿐이다. ‘도’라고 말하는 순간 이것이 간택인가, (도가) 명백(히 드러난 것)인가?
[頌]
지도무난이여!
언(言)도 지도 그 자체며, 어(語)도 지도 그 자체네.
하나[至道] 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一有多種]
둘(여러 가지)에는 두 가지가 없네.[二無兩般]
하늘엔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난간 앞 산 깊으니 물은 차갑네
해골에 의식이 다했거늘 기쁨 어디 있겠는가.
고목에 용의 울음 아직도 남아 있네
어렵고도 어렵나니
간택인지 명백인지를 그대 스스로 간파하라.
[평창]
대립의 차원을 넘어 절대평등의 경지에 들어가면[打成一片, 心境俱忘] 산은 역시 산이며 물은 역시 물이다. 그러나 때로는 산을 산이 아니라 하며 물을 물이 아니라 할 것이니 어떻게 해야만 분명히 알겠는가 봄에는 (만물이) 싹트고 여름에는 자라며,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저장한다. 이렇게 평온무사하게 되면(순리에 따르게 되면) 모든 흔적이 없게 된다.
승이 향엄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향엄은 말했다. “고목리용음(枯木裏龍吟, 고목 속에서 용이 울고 있다).” 승은 말했다. “어떤 것이 도 속에 있는 사람입니까?” 향엄은 말했다. “촉루리안정([骨+蜀][骨+婁]裏眼睛, 해골 속의 눈동자)” 조산이 시를 읊었다.
‘고목용음’이여 진정한 도의 현현이니
해골에 의식이 없을 때 (道의) 눈은 비로서 밝아지네
희로애락과 의식이 다할 때 소식도 다 하나니
본인이 어찌 이 ‘탁중청(濁中淸)을 알겠는가.
[해설]
철저하게 죽지 않으면 언어에 흔적이 남느니, 그대 스스로 간파하라. 깨달은 자는 크게 죽어 다시 크게 산 자이니 언어가 至道 그 자체이며 정식(情識)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마음이 평등하여 照用(體用, 본성과 작용)이 同時이며, 때로는 파주(把住, 부정)의 입장을 취하고 때로는 방행(放行, 긍정)의 입장을 취하며 殺活이 자유자재하다.
제3칙 마대사, 몸져 눕다
마대사(馬祖)가 편찮으셨다. 원주가 물었다. “스님, 오늘은 몸이 좀 어떻습니까?” 마대사가 말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해부처 달부처)”
[頌]
일면불 월면불이여.
오제삼황은 이 무슨 물건인가.
고난의 세월 이십 년이여
그대를 위하여 몇 번이나 창룡굴(蒼龍窟)에 내려갔던가
굴(屈)!(아아, 얼마나한 고통의 날이었는가)
말로는 다할 수 없나니
눈밝은 수행자라도 (부디) 소흘히 말라
[평창]
바다에 낚시바늘을 내리는 것은 오직 용을 낚고자 함이라. 그러나 얻은 것이라곤 고작 “오제삼황은 이 무슨 물건인가”(의 이 한 구절) 뿐이다.
[해설]
일면불 월면불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빠진 달그림자를 건지려는 것과 같다. 거울과 거울이 서로 마주 보고 비추면 보이는 것은 하나인가 둘인가? 찾는 대상과 찾는 자가 둘이 아닐 때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
제4칙 덕산, 위산에 이르다
덕산이 위산(의 주석지)에 이르렀다. 여장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법당에 올라가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뒤돌아보며 ‘없다 없다’ 외치고 나가 버렸다. (이에 대하여) 설두는 (다음과 같이) 촌평을 했다. “이미 간파해 버렸다.”
덕산은 산문 앞에 이르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덕산은) 예의를 갖춘 다음 다시 들어가서 (위산을) 뵈었다. 위산은 (마침) 앉아 있었다. 덕산은 좌복을 들어 보이며 “화상”하고 말했다. 위산이 막 불자를 집으려 하자 덕산은 갑자기 할(喝)을 외치고 나가 버렸다. (이에 대하여) 설두는 (다음과 같이) 촌평을 내렸다. “이미 간파해 버렸다.”
덕산은 법당을 등지고 신을 신은 다음 가버렸다. 저녁이 되자 위산은 수좌에게 물었다. “아까 새로 온 승은 어디 있는가.” 수좌가 말했다. “법당을 등진 다음 신을 신고 가버렸습니다.” 위산은 말햇다. “이 녀석이 이후로는 고봉정상(高峰頂上)에 암자를 짓고 앉아서 불조(佛祖)를 (마구) 꾸짖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설두는 (다음과 같이) 촌평을 내렸다. “설상가상이로군”
[頌]
첫 번째 ‘간파’
두 번째 ‘간파’
설상가상이여, 이미 위험한 지경에 놓였네.
비기장군(飛騎將軍)이 적진 깊이 들어갔으니
완전하게 살아온 자 몇이나 되리.
급히 달아남에
놔주지 않았으나
고봉정상에서 (망상의) 풀 속에 주저앉은 격이네
쯧, 쯧.
[평창]
원오는 果然(點定,放行,긍정), 錯(點破,把住,부정), 點(點頭,부정과 긍정을 겸함)의 세점을 찍으니 득도인은 어느 때는 풀 한 포기를 장육금신(丈六金身, 부처)으로 쓰고 또 어느 때는 장육금신을 풀 한 포기로 쓴다.
[해설]
방행(用, 긍정)과 파주(體, 부정)의 언행을 작가(선지식)가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고봉정상에서 불조를 꾸짖을 수 있다.
제5칙 설봉의 온대지
설봉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진대지촬래여속미립대(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 온 대지를 집으니 벼 한 톨 크기만 하구나) 포향면전(抛向面前, (여러분의) 면전을 향하여 던지나) 칠통불회(漆桶不會, (여러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 타고보청간(打鼓普請看, 북을 쳐서 모두 모이게 하여 (살펴)보도록 하라)
[頌]
소 머리로 사라졌다가
말 머리로 돌아옴이여
조계의 거울 속엔 티끌이 없네.
북을 쳐서 모여 찾아봐도 그대들은 못 보나니
온갖 꽃들 봄이 되어 누굴 위해 피는가.
[평창]
운문이 말했다. “삿된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옳지 않다.” 운봉이 말했다.”쯧쯧. 王令이 삼엄하니 불법적인 상거래는 하지 말라.” 대위철이 말했다. “보라. 보라. 설봉이 지금 여러분의 면전에 똥을 던지고 있다. 쯧쯧. 왜 구린내 나는 것도 모르고 있는가?”
설두는 한 글귀(소 머리로 사라졌다가 말 머리로 돌아 옴이여)로 모든 분별심을 절단해 버렸으니 대단히 접근하기 어렵고 준엄하기 이를 데 없다. 이치나 도리로서 사람을 속박하지 않았다. 자, 그대들은 말해보라. 온갖 꽃들은 도대체 누굴 위해 저렇게 피고 있는가
[해설]
운문家風의 언어는 함개건곤(函盖乾坤, 천지를 뒤덮어 버림)의 기상이 있고, 절단중류(截斷衆流, 분별 망상을 끊어버림)의 준엄함이 있으며 수파축랑(隨波逐浪, 파도를 따라 물결이 굽이침)하는 작가의 수완이 능수능란하다. 어느 날 僧이 물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운문이 말했다. “수미산”
제6칙 운문의 나날이 생일날
운문이 문제를 제기하여 말했다. “15일 이전은 그대에게 묻지 않겠거니와 15일 이후를 한마디 일러보라.”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운문은) 스스로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말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나날이 생일날)
[頌]
거각일(去却一, 하나를 버리고)
염득칠([手+占]得七, 일곱을 거론함이여)
위아래 동서남북 맞설 자 없네
서서히 가며 흐르는 물소리 밟아 끊고
마음대로 보며 새 날아간 흔적 그려내네
[평창]
사람들은 대부분 분별의식 속에 빠져 있나니 언어가 나오기 이전을 향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것이 제1구인가. 위로는 모든 부처가 있음을 보지 않고, 아래로는 중생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밖으로는 산하대지가 있음을 보지 않고, 안으로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감각작용)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삼라만상 속에 (내재해) 있는 독로신(獨露身, 본성)은
오직 스스로가 (깨달아) 긍정해야만 비로서 친해질 수 있는 것이네
이전엔 잘 몰라 길가에서 찾았더니
오늘은 불 속에서 얼음이 어는 걸 보네
[해설]
동념즉괴(動念卽壞)
제7칙 법안, 혜초의 물음에 답하다
승(혜초)이 법안에게 물었다. 혜초가 화상에게 묻나이다.”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법안이 말했다. “여시혜초(汝是慧超, 그대는 혜초니라)>”
[송]
강남에 봄바람 아직 불기 전
자고새는 꽃숲에서 우짖고 있네.
삼단의 물결 거슬러 고기는 용이 됐거늘
어리석은 이는 아직도 밤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있네.
[평창]
언어의 흔적조차 없는 경지를 얻고자 하는가. 분명히 그대에게 이르노니 언어,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이니 (이 언어 속에는) 하늘과 땅을 뒤덮는 (소식이 있다.) 내가 그대에게 묻노라. (고기는 이미) 용이 됐으니 (그 용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해설]
언어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키면 언어가 발화(發話)된 근원을 잊게 된다. 개는 흙덩이를 물지만 사자는 그것을 던진 손을 물어버린다.
제8칙 취암, 하안거 말에 설법하다
여름 결재가 끝나는 날 취암이 대중에게 말했다. “여름 결재 기간 동안 줄곳 나는 형제들을 위해서 설법했다. 자 보라. 취암의 눈썹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보복이 말했다. “작적인허심(作賊人虛心, 도적질한 사람의 마음은 두려움에 차 있습니다)” 장경이 말했다. “생야(生也, 눈썹이 나왔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관(關, 관문).”
[頌]
취암이 대중에게 한 말은 천고에 대적할 사람이 없네
‘關’자로 응수했으나 돈 잃고 쇠고랑을 차는 격이네
멍청한 보복은 깎아 내리기도 추켜올리기도 어중간하네
말 많은 취암은 분명히 도적이라 백옥에 흠이 없거니 그 누가 진위를 구분하겠는가
장경은 알아차리고 눈썹이 나왔다고 말했네
[평창]
자, 말해보라. 돈 잃고 쇠고랑을 차는 것이 취암인가, 설두인가, 운문인가? 보복이 깎아 내린 곳이 어디며 또 추켜올린 곳이 어딘가? 저(설두)의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은 금물이니 여기 이르러서는 자신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설]
취암 도적이 눈썹 하나로 마음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지켜가야 한다. 關!
제100칙 파릉의 삼전어(三轉語)
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道입니까?” 파릉이 말했다 “명안인낙정(明眼人落井)” 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취모검(吹毛劍, 지혜의 검)입니까?” 파릉이 말했다.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撑著月, 산호 가지마다 달빛이 밝네).” 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바의 종지입니까?” 파릉이 말했다.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은그릇 속에 눈이 가득 담겼다.)”
[頌]
어지러움을 평정하려 하나니
극치에 달한 것은 오히려 치졸해 보이네
혹은 손가락에, 혹은 손바닥에 있나니
하늘에 기댄 검이 흰 눈빛을 뿜네
대야(大冶)도 이 검을 다룰 수 없고
양공(良公)도 이 검을 닦느라 쉴 틈이 없네
대단하군. 대단하군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撑著月)’이여
신개(新開)의 어르신네여
핵심을 말하는 방법이 특별하니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이라고 말할 수 있었네
99종의 외도는 마땅히 알지니
모른다면 저 하늘가의 달에게나 물어보라
제바의 종지여, 제바의 종지여
붉은 깃발 아래 청풍이 불고 있네
[평창]
반산보적은 이렇게 말했다.
마음 달이 외로 밝아
그 빛이 온누리를 적시네
달빛은 경(境, 경치)에 비치지 않으며
경(境) 또한 있는 것이 아니네
달빛과 경을 모두 잊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
모든 말과 언어는 다 불법이다. 경장주가 법문을 하다가 한 손을 세우며 말하길 “보는가”라고 하였다. 모든 곳이 그대로 취모검이다. “삼단의 물결은 높아 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올라갔거늘/ 어리석은 이는 아직도 밤 연못의 물을 퍼올리고 있네
[해설]
파릉은 운문의 제자이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도 아름답지 않은가. 명안인낙정(明眼人落井)이여, 산이 물 위로 간다.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撑著月)이여, 온몸이 눈이요 온몸이 손이로다.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이여, 부처가 말이 없는 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참조:벽암록/석지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