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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    
글쓴이 : 오길순    14-03-10 10:00    조회 : 6,761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

오 길 순


후회 줄이기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기 전에 후회하는 25가지’를 발표했다.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며 수년 간 1000여 명을 설문한 결과를 기록한 <<삶의 마지막에 주는 10가지 질문>>은 내게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도 작성하고 싶게 한다.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는 후회를 줄이기 위해서는 하고픈 일을 실천하는 삶이 필요하게 여겨진다.

이 가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에서 기획한 ‘서울시민과 함께 하는 서울 시(詩) 문학 기행’은 25가지 중 하나를 상당히 채워 준 기행이었다.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서울의 ‘가고픈 곳을 여행하지 않았던 곳’들은 모두가 신선했다. 위인이나 시인들이 살았던 옛 골목을 거닐 때마다 그들의 외롭고 고결한 삶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도 만들었다.

안내를 맡은 김경식 시인은 우리를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역사의 현장을 답사할 때마다 그의 해박한 해설은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김소월, 윤동주 등 일찍이 가버린 시인의 일생은 새삼 애틋하고 독립운동으로 가신 열사들의 마음도 뜨겁게 전해졌다. 원서동 박인환의 옛 집 앞에서 섰을 때는 매미허물처럼 허물어지는 저 빈 집이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11월 14일, 4번째 여정에서 망우리 공원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 곳은 공동묘지라기보다 자연 공원이었기 때문이다. 크고 우거진 숲을 따라 걷는 하루는 새삼 삶과 죽음이 동체라는 걸 깨닫게 했다. 그들의 날숨인 듯 맑은 공기를 우리의 들숨으로 마실 때마다 한없이 편안했다. 특히 문인과 예술인의 무덤에 섰을 때는 영원히 사는 법을 알아낸 양 즐거웠다. 그들의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향기로운 집 한 채 가슴에 지어진 양 뿌듯했다.


산딸기나무가 지키는 시인 오 상 순 (1894.8.9-1963.6.3)


궁중 무수리들의 빨래터였다는 삼각산 중턱에 묻힌 오상순 무덤은 쓸쓸했다. 후손이 없어서일까. 산딸기나무가 정수리에 거칠게 나 있었다. 집도 절도 없이 살다 간 공초에게 붉은 열매는 여름을 위안했을까. 그는 어쩌면 25가지 중의 하나인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재미있는 것은 그가 <첫날밤>이라는 시를 쓴 것이다. ‘화촉동방 아래 청춘의 알몸이 어족인 양 노닌다’는 묘사는 결혼한 사람만이 표현할 은유 같았다. 인품과 실력도 겸비한 그가 가정의 무소유를 실천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죽을 때 무거울까봐.’였다는 대답도 결코 가볍지 않게 들렸다. 異音同曲이라는 <나와 시와 담배>처럼 방랑의 영혼과 담배는 일심동체였을까.

가파른 경사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무덤 앞에서 일행은 잠시 웃었다. 골초였다는 시인의 묘소 앞에 자그마한 자연석 재떨이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흠모하던 애연가가 산허리 돌아가는 구름에 섞은 연기일까. 동가숙 서가숙했다는 시인처럼 한가로운 구름 한 점이 갈 길 머문 우리를 조용히 붙잡았다.

‘空超吳相淳흐름위에보금자리친오흐름위에보금자리친나의魂’이라 새겨진 정방형 비석의 <방랑의 마음> 첫 구절은 그의 일생을 함축한 것 같았다. 미국 쑥부쟁이 비슷한 무명초가 무덤 위에서 푸르러 시인의 기다림인 양 흐름 위에 지은 그의 보금자리를 내내 돌아보았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은 박 인 환(1926.8.15-1956.3.20)시인


망우공원 산 아래 자리한 박인환의 무덤은 북향이었다. 일행인 여서환 시인이 <세월이 가면>을 암송할 때 모두가 숙연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작은 비석에 쓰인 이 싯귀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렸을까. 그 시대 실연으로 절망한 사람들도 패션 리더였다는 멋쟁이 시인을 떠올리면 불끈 일어섰을 것 같다. 전 후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시인의 절망은 오히려 외로움과 슬픔을 씻어주는 희망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비밀의 화원같은 구절에서 중학생 소녀도 얼마나 설레었던가.

그는 지금도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즐겨 암송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작은 문학비에 새겨진 <목마와 숙녀> 한 구절은 이 시대에도 절망과 상실을 끝없이 위로해 줄 것 같다. 통속 아닌 사랑이 있으랴. 버리려 해도 남는 통속의 극치, 사랑이란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떨치게 하는 마법의 통속이 아닐까.

북향인 그의 보금자리에 마음 한 점 덮고 왔다. 서른한 살, 일찍이도 세상을 뜬 그의 젊음 앞에서 죽음도 삶의 연속처럼 추울 것 같았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리라. 시 한 수, 노래 한 곡 부르고 가는 이들 있어 무덤은 이제 솜이불을 덮은 듯 따뜻할 것도 같다.


천도복숭화의 화가 이 중 섭(1916-1956)


이중섭을 떠올리면 잘 익은 천도복숭아가 연상된다. 친구인 구상 시인의 병상에 이중섭이 나타나질 않았더라 한다. 천도복숭아 그림을 그리느라 늦어진 것이다. 과일 하나 사 들고 병문안을 할 수 없었던 화가에게 복숭아 그림은 애절하기만 하다. 무병장수를 손끝으로 기원했을 마음이 그림에 들어 잇는 듯 하다.

그의 <황소>는 더욱 짠하다. 절친인 오상순이 버린 담배 은박지에 그리기까지 가난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랴. 허기사 그는 은박지에 선화를 많이도 그렸다. 절망 끝에서 걸작이 탄생하는가. 화구를 구하지 못한 화가가 그린 <황소>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금방이라도 ‘음매~~·’울 듯 역동적인 그림은 붉은 색상의 분위기로 더러 태만한 나를 깨운다. 뜨거운 열정이다.

몇 년 전 그의 일본인 아내가 망우공원에 성묘를 왔다고 한다. 90여세인 이남덕여사가 휠체어를 타고 입국한 것이다. 직접 안내를 한 공원 관리소장에 의하면 ‘묻지 말라’고 대답하더란다. 이중섭과 절친인 오상순과 하룻밤 뒹군 적이 있느냐는 짓궂은 물음 앞에서 통역을 통한 그의 대답이 재치있다.

호사가들은 그들의 진한 우정과 인간애를 짐작할 뿐이다. 현해탄 넘어 가족을 그리는 지고지순한 화가의 사랑 또한 따스함으로 전해진다. 가족을 만나고픈 그리움은 어떤 영양제보다도 충만한 열정이 되어 화혼을 불태우게 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이 대부분 역동적인 것은 절체절명의 그리움이 힘찬 획으로 승화된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사람들


교육자이며 시인인 방정환 묘소를 둘러보았다. 어린 날,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어린이 날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어리다가도 신이 났었다. 푸른 하늘 높이 나는 비둘기처럼 즐거웠다. ‘아새끼’라는 비어가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童心如仙’, 한 선각자의 지극한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무덤은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울한 소나무들을 뒤로 하고는 신선처럼 여긴 아이들을 향해 너른 마음을 펼친 것 같았다. ‘어린이의 동무’라는 비문이 새삼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 따스한 이름 ‘동무’가 일상화에서 멀어진 것은 참으로 아쉽기도 하다.

<님의 침묵>을 지은 한용운, 서예가 오세창, 정치가인 죽산 조봉암, 독립운동가 문일평, 송암 서병용, 월파 김상용 등의 묘소에도 참배를 드렸다. 모두가 바르게 살다간 분들이기에 그들 역시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법’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천주교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이라 일컫는다.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면 전대사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져간 아기의 영혼이며 주변에서 친했던 이들이며 돌아가신 조상을 위로하듯 무명 묘소를 참배한 금년 11월은 마음바닥에 갈앉은 작은 얼룩마저 닦아낸 것 같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죽음의 불가항력에 눈물을 흘렸나.

공원을 내려오는데 묘비도 없는 봉분들이 발길을 잡았다. 무연고 묘소인 양 하여 조용히 묵념을 드렸다. 계절의 알싸한 분위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돌아갈 본향의 길에서 무연고 묘소를 스치는 마음을 한 줄 적었다.


산봉우리도 /풍화된 듯/낮아진 산길//망우공원 길옆에/나란한 /세 墳//


아빠 엄마 아기인가/한 墳은 아주 작다//


금자동아 복자동아 /큰 사람 되라//밤새워 토닥거렸을 /아빠 엄마의 웃음소리//

평장으로 버리지 못한/봉분의 슬픔//한 백년//오가는 길섶/ 그리도 지켰거니//


하늘까지 닿고팠던/저 낙락장송으로 서 있는/푸르른 부모의//애절한 정한

<무연고 묘소 앞에서>, 오길순


아! 윤동주(1917.12.30-1945.2.16)

여정의 마지막인 11월 28일, 잃어버린 별을 찾아 떠나는 여행처럼 조금 설레었다. 추위가 제법인데도 붉은 단풍나무 길이 반겼다. 스물여덟,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떠난 시인 윤동주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도 가벼웠다.

청운동에 있는 문학관은 규모가 작았다. 몇 십 년 사용했던 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한 곳이라서 그런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인의 순수를 그대로 전하고자 그리도 작고 분위기 있는 집으로 설계한 것이다.

닫힌 우물을 상징한 10여 평 쯤 되는 어두운 문학방에서 영상시가 흘러내렸다. 문득 후쿠오카 감옥의 벽도 그러한가 싶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A4 용지 두 장 정도의 천정 문만 빤한 문학방은 <자화상>에 목이 메었을 청년의 심사를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간 이국에서 날마다 이상한 주사를 맞을 때 두려움도 짐작되었다. 눈물인 양 흐르는 영상시에 일행은 벌써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앉으니 밤이라면 별이 쏟아질 듯 하늘이 가깝다. <별을 헤는 밤> <서시>를 그 곳 즈음에서 지었으리라는 연유로 ‘서시문학비’가 세워졌나 보았다. 연희전문 시절, 인왕산 언덕에 올라 별에 환호했을 것이다. 해방 6개월 전 그토록 환호하던 별들을 못 본 채 시신이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기만 하다.

개발의 기회를 그 곳도 비껴가지 못했나 보았다. 저 아래 마을 어디쯤 잘 생긴 청년이 살았을 누상동 9번지가 헐어버린 다음에야 알려진 것이다. 다행히도 윤동주 문학관과 언덕이 마련되었으니 그의 맑은 시혼은 언제라도 우릴 반길 것이다.

그는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 누상동 9번지에서 후배 정병욱과 하숙을 했다. 훗날 정병욱(1922-1982)은 시인의 육필 원고를 출판한다. 섬진 강 옆 망포 정병욱의 집에 고이 보관했던 원고가 아니었으면 전설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친구 정병욱 덕분에 시인의 유작이 우리에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만주 길림성 명동에 윤동주 시인의 집이 있었다. 몇 년 전 여름 길림신문주최 세계문학 상시상식 덕분에 백두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초라한 유물 몇 가지가 있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는 개망초와 쑥대머리가 거칠게 우거져 있었다.

옥수수 밭 저 앞들에는 해란강이 흘렀다. 문득 이름까지 바꾸며 말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인 듯 해란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웠다. 이젠 개천이 된 해란강처럼 선구자들의 삶도 잊혀져 가는 게 서글펐나. 옥수수 밭 바람은 그들을 잊지 말라는 듯 거칠게 불어왔다.

시인의 집 마당에는 나팔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한나절도 다 못 핀 시인의 일생처럼 참으로 애잔했다. 더욱이 눈물처럼 맺힌 이슬은 벌써 햇빛에 사라지고 있었다.

나그네들은 우물가를 서성였다. 나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발길을 돌렸다. 우물의 둥근 나무 뚜껑을 열면 시인의 <자화상>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마침 작은 벽면 칠판에 삐툴뻬툴 써 있는 백묵 글씨가 보였다.

‘윤동주 오늘의 청소당번’

‘김옥분 오늘의 지각생 ‘

‘구구단을 못 외운 학생 문익환 ’

‘오늘 떠든 학생 송몽규.’

1930년 대 아기자기한 초등학교의 교실풍경이 서글픔을 풀어주었다. 보고 또 본 그의 자화상처럼 그리운 친구들이 우리의 발길을 웃음으로 잡는 것 같았다. 패,경,옥...시인과 공부 했을 이국적인 아름의 소녀들도 새삼스러웠다. 시인의 외사촌으로 동갑내기 친구인 송몽규는 날마다 이상한 주사로 몰골이 된 시인의 모습을 증언한 사람이다. 그도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영원한 큰 별 안 중 근


길림성 시인의 집 가까이에는 선바위가 있다. 안중근 의사가 날마다 권총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선바위를 지나노라니 여러 개의 총구가 가슴을 스쳤다. 오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영원히 지켜낼 것 흔적인 것 같아 그의 애국 혼을 새삼 우러렀다.

남산 안중근의사 박물관에서 ‘大韓獨立’ 혈서를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3년간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國家安危에 마음을 다한 그의 勞心焦思가 뭉클했다. 비문에 새겨진 낙관은 ‘나라 잃은 설움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듯 단호했다. 손가락을 툭! 잘라 피로서 지킨 고국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큰 별 하나 가슴에 달고 돌아오는 길에 내 다섯 손가락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없었다. 홀로 손가락 자르며 걸어 간 님의 길이 얼마나 힘겨웠으랴. ‘혼자 가면 길이지만 여럿이 가면 역사’라는 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영원한 별, 그가 이룬 역사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가 이룬 역사는 참으로 위대했다.

<<펜문학>>2014.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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