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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봉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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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등이 사는 나라    
글쓴이 : 봉혜선    24-09-09 15:49    조회 : 2,691

책등이 사는 나라

 

 

봉혜선

 

 늘 서성이는 책장 앞이다. 출석부인 양 훑는다. 책등은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쳐 오는 첫사랑 기운을 뿜는다. 책들은 스스로 네모에 갇혀 있되 모두 나의 초청으로 참석한 손님이자, 이제 나의 주인이 된 자들이다. 책장은 나를 만들거나 바꾸어 준 장소다. 책등의 키나 넓이는 거의 비슷하다. 펜은 칼보다 힘이 세다고 했고 책을 생활보다 가깝게 생각해 왔다.

책장은 작가별, ·수필· 소설 등 장르별로, 독서 토론별 책으로도 분류해두었다. 같은 칸이면 색깔별로 모아두거나 키를 맞추어 놓기도 했다. 나만의 분류 방식이기도 하다자칫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분류해 놓은 것들의 대화를 들으며 대화 속으로 끼어든다.

작가별로 분류해 둔 칸에서 들리는 건 작가 나름의 주장이다. 타인에게 말 걸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이룬, 자아를 드러내고 자아를 뛰어넘으려 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훑는 눈길은 오래 머문다. 슬픔을 자아내 동감하던 초창기 소설들과 여성 목소리가 높은 데도 있다. 글의 세계로 이끈 이청준 류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던 붓을 펼치기도 전에 꺾이게도 했다. 이승우, 최윤으로 이어지는 더 용기를 북돋게도 한, 한때 탐닉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더듬는다오래 같이 있어주어 언제나 믿는다긴장할 것 없는 친정 같은 안온함이 감돈다

시집 코너다. 시집은 대개 얇다. 좁은 시집의 책등은 제 이름도 온전히 주장하지 못한다. 시로 만족하지 못하고 통째로 필사하곤 한 필사 노트에는 짧은 시에 단 나의 댓글이 더 길다. 시집의 빈 곳에도 여지없이 내가 메모해 놓은 글이 꽉 들어차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그들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알 것 다 알고 있다는, 다정했으나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무방한, 첫사랑 같은, 사랑했으나 헤어진 애인 같은 애틋한, 안개빛 같은 새것이 내는 흰빛이나 바래어 노랗지도 않은 그 중간께의 색을 내고 있다.

 아직 내게 선택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무엇에 이끌린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은 종합 시집이니 티저 시집이니 선집도 여럿이다. 저들끼리 대화하는 방식은 제목으로이다. 어느 책은 묻고 어느 책은 대답한다. 싯구 같은, 댓구 같은 책끼리도 모아두었다.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환호하다가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좌절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늘이 발달>>을 하는가 하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충고에서 헤매기도 한다.

 독서 토론 칸은 자유분방하다. 여러 토론 모임에서 선택받아 자유 토론을 한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예를 들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냐 가벼움이냐에 대한 해석과 정의 내리기에서 부터, , 제목부터 혼선을 안긴다. 영화화된 제목은 프라하의 봄(필립 카우프만 감독)이고  1984 동물농장(조지 오웰)과 같은 시대를 방증한다. 나의 주장을 펼칠 수 없이 발표자에게 쏠리며 동감했던 시간이 다시 떠온다. 비어 있던 나의 마음을 내보일 수 없던 통렬함에 다시 낡은 책등을 쓰다듬는다.

 누구나 읽었을 법하지만 읽은 이가 거의 없다는 고전반열에 오를 법한 책이 꽂혀있는 칸이다. 대부분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읽기가 고역스러워 여전히 고()전인 채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견고한 성처럼, 해석이 분분하며 욕도 먹었을 법하고 때로는 끌어내려졌을 때도 있던 듯 폐허처럼 낡았지만 책등을 부분 보수한 채로 건재하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이사가 잦았다면 폐기 목록에 다만 한 줄로 남아 있을는지.

 함께 구입한 것들끼리 모아둔 코너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는 보지 못한 분류이나 개인 서가의 특질 상 가능한 분류이다. 정신의 방향이나 취향을 여실히 증명하는 코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이 느끼는 발전과 변화에 따른 칸이다. 한 군데에도 나의 역사가 보인다.

 책장 가운데에는 글쓰기 안내서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압도적이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안내서를 보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구석으로 숨거나 자꾸만 무엇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그 부분이 약해서 방어 기제가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쓰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니 중심부로 옮아가는 발길은 활기차다.

 요리 코너와 리빙 쪽은 점점 열세다. 나이가 들어가니 인문학, 심리학, 죽음을 다룬 책이 늘어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 담당 의사가 보내준 책은 아직 펼쳐보지 못했다. 또한 권 꽂지 못한 책이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눈 머는 병이 옆 책으로 옮을까봐 따로 두었다. 책만큼 중요한 눈. 무상해진 마음으로 가난하고 편협한 책장을 훑다가 문득 책등이 사는 나라가 그리웠다. 도서관, 책등이 사는 나라, 책등만 사는 나라이다. 도서관에 사는 책은 책등이 얼굴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열리지 않는다. 글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여전히 들썩인다.  

 <<수필과 비평, 2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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