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빵, 추억의 선물
유영석
2년 전 어느 겨울, 안양에 지인을 만나러 갔다. 영하 10도의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한 날이었다. 길을 걷던 중 모퉁이에 있는 찐빵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어린 시절 부모님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며 발걸음이 멈췄다. 찐빵은 사랑과 추억이 담긴 특별한 선물이다.
솥 찜기 안에서 진하게 피어오르는 찐빵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김이 손님들 머리 위로 흩뿌려지며 정감 어린 냄새를 풍겼다. 뜨거운 수증기가 흐르는 찜통 안의 받침대 위에 얹어진 찐빵은 탐스러웠다. 솥뚜껑을 열고 웃으며 찐빵을 담아주는 이의 손길은 사랑의 선물이고 받는 이의 손길은 감사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찐빵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겨울철 대표 간식이다. 작은 찐빵 한 조각에는 다양한 재료와 정성이 담긴다. 찐빵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반죽의 숙성 시간, 둥근 모양 잡기, 팥소의 질과 양, 찌는 시간과 온도 등 조리 기술과 손재주가 필요하다. 찐빵은 단순히 간식을 넘어 아이디어와 독창성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 맛과 모양은 우리에게 추억과 감성을 자극한다.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도 북청은 물장수들이 많았다. 아버지께서는 1·4 후퇴 때 정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신학교를 나와 목회 활동을 하시다가 간호사인 어머니와 1955년에 인연을 맺었다. 성격이 올곧은 아버지는 어떤 연유였는지 교회를 떠나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홍제동 문화촌 161번 버스 종점 근처 허름한 판잣집 앞 리어카에서 찐빵을 팔았다. 리어카 안에는 찐빵과 차를 만드는 기구들이 놓여 있었고, 그 천장 지붕 아래에는 '찐빵, 계란빵, 온차'라는 이름표를 단 천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버스에서 내리는 행인들을 유혹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불을 켜고 일하시는 부모님은 천생연분이었다. 반죽의 상태는 찐빵의 맛을 좌우한다. 반죽하시는 아버지의 능수능란한 손재주는 마법과도 같았다. 손은 순백색으로 물들었고, 옷은 하얀 눈을 맞은 듯 얼룩졌다. 팥소를 만들 때는 팥을 계속 저어야 한다. 한 눈이라도 팔면 금세 눌어붙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팥, 설탕, 소금을 섞어 팥소를 만들어 반죽 조각 안에 넣으셨다. 강직하고 신념이 강한 아버지로 인해 삶은 늘 팍팍했지만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안으로 품으셨다.
부모님은 손님들을 밝은 미소로 맞이했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단순히 찐빵을 파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자 했다. 찐빵 리어카에서 퍼지는 그 온기는 작은 마을을 가득 채우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찐빵 리어카는 서민들의 고된 일상을 녹여주는 위로와 사랑이 숨어 있었다. 이웃과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는 힐링의 공간이지 않았을까.
부모님이 손수 만드신 찐빵은 혼이 담긴 예술품이었고 가족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나는 커서 비로소 알았다. 오랫동안 빵 만들기 작업을 하면 어깨와 손목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온다는 것을⋯. 그렇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힘들다는 표정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손과 팔은 유달리 두꺼웠다. 어린 시절 나는 함경도 출신은 다 그런 줄 알았다. 찐빵 만들기, 냉차 장사, 경비 등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면서 그렇게 두꺼운 손과 팔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왜 자식들은 늘 부모님의 사랑을 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걸까. 송강 정철의 시조 <훈민가(訓民歌)>의 ‘부모님 살아생전에 섬겨 모시는 일을 다 하여라’라는 구절은 마치 나를 위해 쓴 듯하다.
아버지는 빵을 팔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리어카에 어린 남동생을 태웠다. 여동생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시 가난을 잊었다. 항상 밝게 웃으며 리어카를 몰던 아버지의 음성이 여전히 귓가에서 울려 퍼진다. "영석아, 아빠 손 꼭 잡아!" 철부지 남동생의 재롱은 우리 가족의 하루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달과 별은 부자와 가난을 가리지 않았다. 달동네 집으로 향할 때 초롱초롱 빛나는 별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휘영청 밝은 달은 어둠을 밝히며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었다. 가난은 우리 가족에게 화목의 통로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은 ‘찐빵’이었다. 얼굴이 찐빵처럼 동글동글했기 때문이다. 그 별명은 단순한 외모를 넘어 친구들과 순수한 우정의 상징이자 나의 자부심이었다. 친구들이 별명을 부르며 놀려대도 끄덕없이 잘 어울려 지냈다. 부모님으로부터 웃음 DNA를 물려받으면서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이 찐빵의 형상으로 지금껏 나를 감싸주었다. 찌그러진 달보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좋지 않은가. 찐빵은 나누어 먹는 따뜻함이 배어 있고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환경은 불우했지만 아버지는 감성이 풍성하고 늘 긍정적이었다. 주말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실로폰이나 피리를 연주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판잣집 풍경치고는 너무 이채로웠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민요인 ‘아! 목동아(Danny Boy)’를 즐겨 부르셨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남한 가족의 삶의 애환을 달래셨던 것 같다. 이 노래는 19세기 중엽부터 아일랜드 북부의 런던데리(Londonderry)주에서 불린 민요로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아들에 대한 연로한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 아픔’을 표현한다.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이 애절한 노랫말에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아버지의 연주와 노래를 마음으로 들으면 그리움이 더욱 깊어진다.
아버지는 든든한 기둥이었고 어머니는 견디고 피는 꽃과 같았다. 평생 성실을 외치며 게으름을 멀리하셨고 자식들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폐포파립(弊枹破笠:초라한 차림새)의 환경 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미소와 찐빵 향기, 그 추억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이 세상 모든 부모님의 미소는 모나리자보다 더 아름답다.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어찌 모나리자에 비하랴. 엊그제 동장군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부모님의 환한 미소가 햇살을 타고 천상에서 내려오는 듯하다. 부모님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힘이 된다.
『한국디지털문인협회 5호 문집』 - '내 인생 최고의 선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