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한 수 배우다
노 문 정(본명:노정애)
우리집에는 책이 좀 있는 편이다. 이사할 때 마다 정리하곤 하지만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새끼라도 치는지 점점 늘어서 여기저기 쌓이기 일쑤이다.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것이 많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과감한 정리는 희망 사항일뿐 책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주인 탓이다. 책과 연애라도 하는지 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어쩌겠는가. 늘 새롭고 신선해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그런 애인이다. 덕분에 지인들이나 아이들 친구가 오면 보거나 빌려가는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빌려가는 사람과 날짜를 적어 두면 누구라도 빌려 갈 수 있다. 돌려받는 것은 빌려준 사람의 몫이다. 책은 대부분 회수된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이 어느 책이 좋으냐고 내게 묻곤 한다. 중학교 3학년인 큰아이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는 책은 <<진주 귀걸이 소녀>>이다. 작가가 한 그림에 보인 관심이 얼마나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는지 설명하며 권한다. 많이 빌려준 탓에 조금 낡아 버리긴 했지만 이 책은 대여 1순위다. 이런 사실을 출판사나 서점에서 안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 이 책을 보고 가족과 함께 보고 싶다고 구입한 사람도 있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이 우리 집으로 온 것은 몇 해 전이었다. 어느 전시회에서 이 소녀의 슬픈 눈빛을 보고 한참 머물렀던 기억이 책을 사게 했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인기가 좋았었다. 바쁜 틈틈이 이 책을 읽는 남편은 TV와 짧은 이별을 했었다. 중학생 큰 딸이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알게 되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작은아이는 300쪽이나 되는 책을 무리 없이 읽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물론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흘린 땀과 정성을 공유할 수 있다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 책의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작가로서의 나의 기본적인 목표는 독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책장을 넘기도록 늦게까지 잡아두는 그런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바램을 충분히 만족 시키고 있는 책이다. 나 또한 읽는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이 그림에 매료되어 포스터를 자신의 방에 붙여 두기만 했단다. 오랫동안 자신의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에 호기심을 느껴서 화가인 베르메르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메르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았다. 1632년 네덜란드 델프트 태생이며 부유한 집안에 장가가서 15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 4명이 죽었다. 그리고 35점의 작품만을 남겼고 43살에 갑자기 죽었다. 슈발리에는 말한다. “화가에 대해 알려진게 없다면 그건 내가 상상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라고. 그런 작가의 상상은 알려진 화가의 삶과 그림들의 뼈대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한권의 책이 되었다.
최근 큰 아이 친구가 이 책을 빌려갔다가 보내왔다. 표지 안쪽에 내게 주는 메모가 쓰여 있었다.
“아줌마! 책이 너무 재밌었어요! 시험 끝나고 본 책 중에 최고였어요. 책에서 베르메르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베르메르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다는 옆모습을 더 많이 그린 것 같아요. p159의 그림은 표정을 보고나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베르메르가 정면을 안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옆모습은 굉장히 신비스러운데...”
그것을 보며 난 159쪽의 그림 <포도주 잔을 든 여인>을 자세히 보았다.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 보니 정말 여인의 표정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림에 관한 글 속 이야기도 흥미롭다. 주인이 하녀에게 부인의 옷을 입히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설정과 시선이 화가를 향하도록 했으며 그런 시선처리의 그림은 마지막이었다는 것도.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깊이가 다르다. 단순히 내용을 따라가며 누군가의 삶을 한편의 영화를 보듯 읽는 나는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지 못했음을 그때서야 알았다. 한 장의 메모가 책을 달리 보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우리집에서 책을 보거나 빌려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칙을 정했다. 책을 본 모든 사람은 다 읽고 포스트 잇 메모에 짧은 느낌을 적어 표지 뒤에 붙여 두게 했다. 최근에 읽은 책인 <<에너지 버스>>에는 모든 식구들의 메모가 붙어 있다. 같은 책을 보아도 느낌은 다 다르다. 아이들의 생각하는 깊이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 후 책을 빌려간 친구들도 그것을 잘 실천해주고 있다. 다른 이들이 그런 메모를 먼저 본다고 해도 책을 보는 시각을 자신의 입장에만 맞추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생각이다. 즐거움을 공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큰 아이 친구가 고맙다. 아마도 10년쯤 흐른 뒤에는 우리집에 있는 인기 도서에는 많은 메모들이 붙어있을 것이다. 책을 보는 즐거움과 읽었던 사람들의 느낌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책과의 연애가 더 깊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