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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태양    
글쓴이 : 김숙진    24-10-10 16:47    조회 : 1,468

영화‘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에는 흑인 선생 ‘마크 테커리’가 나온다. 테커리 교사는 권위를 내려놓고 학생과 서로 동등한 관계로 지내고자 리고 학생들의 피부에 와닿지도 않는 교과서 대신 진솔한 이야기로 사제간 불신의 벽을 무너뜨린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내 마음에 태양을 떠올렸다.

 여고 시절 국어담당이셨던 최순열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선생님은 한여름을 빼놓고는 일 년 내내 곤색 양복만 입으셨다.

  "선생님은 왜 그 양복만 입으세요?"

  하며 아이들이 짓궂게  물으면

  "난 똑같은 양복이 여러 벌이거든"

  하시며 부드럽게 넘기셨다. 항상 친근한 미소와 말투로 우리들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 주시는 선생님을 학생들은 무척 따랐다. 그 당시에는 한 반에 거의 65명 가까이 있었으니 여섯 반만 수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390명인데 그 이름을 어찌 다 외우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선생님이 잘못 불렀다고  말한 친구가 없을 만큼 이름 한 번 틀리지 않고  불러 주셨다. 게다가 학생들의 작은 변화도 정말 빠르게 알아채곤 모두 관심 가져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고품격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늘 재미있었다. 수업하시면서 중간중간 인생의 지표가 될 만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이 ‘그 누구의 탓을 하지 말라’는 당부이셨다.  훗날 난 성당에서 신부님이 당신의 주먹으로 가슴을 살짝 세 번 치시면서  '내 탓이오'를  하시는 모습 보고, 선생님이 자랑스러웠다.

 그럼에도 그 당시 선생님 무색하게 난 심한 '부모 탓 병’에 걸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그때는 피아노 레슨도 받고 싶고, 미술학원 좀 다녔으면 소원이 없겠고, 과외도 좀 받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정 형편상 사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다.  친구들이 과외를 받네, 미술학원에 다니네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났는데 그 火를 모두 부모탓으로 돌렸다. 공부도 하기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도 간신히 가서 겨우 버티다가 보충은 무조건 다 빼먹고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소위 논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면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면 멈춰지기가 않았다. 우리의 아지트는 학교 앞에서 조금 떨어진 분식집 쪽방이었다.  쪽방은 분식집 아주머니 쉼터인데  손님이랍시고 우리가 점령해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돈만 생기면 미친 듯이 달려가 떡볶이 , 감자, 쫄면, 라면 등을 먹어대며 음악 듣고 수다 떨다 초저녁 잠까지 들어 버리면 아주머니가 흔들어 깨워주셨다.

 결국 학생지도부 선생님에게 몽땅 잡혀 명예로운 학생부실에 내 이름 석자도 떡하니 올라가는 신세가 되었다. 학생부 지도 선생님의 엄청난  지도를 받고 앞으로는 반듯하게 살겠다는 뜻의  반성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최순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너무나 창피하여 쥐구멍을  찾고 있는 나를 보시곤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며 학창 시절 모범생으로만 살면 나중에 추억거리가 없어서 못쓴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무엇이든 다 이야기를 들어줄 터이니 하고 싶은 말 다 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하필 선생님 앞에서 이게 뭔 꼴인가 싶어 아무 말 못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은은한 눈 빛으로 계속 바라보고 계셔서 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선생님이 늘 환경 탓, 부모 탓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꾸 탓만 하게 되어 탓하기 싫어 그냥 놀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두 내 탓이네’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 난 조실부모한 사람이야. 누님이 버스 차장을 하여 날 가르쳤지. 그런데 누님이 엄청난 오해에 휘말려 왼쪽 발의 반쪽을 잃으셨어. 우리 누님이 삥땅을 했다는 거야.  버스 운행이 다 끝났는데도 버스회사는 돈이 안 맞는다고 여차장들을 다 모아놓고 몸수색을 했다는군. 그런데도 돈이 나오자 않자 너무 화간 난 사장이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던졌는데 하필이면  그 물이 누님 발등을 덮은 거야. 그때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누나는 병원비가 아까워 그 고통을 참으며  전혀 내색 없이 참다가 결국  불구자가 되어 버스 차장을 그만두셨어. 그래도 내 학비를 벌어야 한다며 닥치는 대로 일해서 날 대학까지 보내주셨지.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야? 그럼에도 난 누님께 짜증을 내곤 했어. 힘들다고 공부가 쉬운 줄 아냐고 누가 인생 살라고 하면서 투정을 부렸지. 우리 누님, 이런 동생에게 지금까지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어. 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누님을 사랑하고 존경해. 그러나 내가 좀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왜 누님의 희생과 사랑을 뻔뻔하게 받아먹기만 했을까? 항상 죄송하고 후회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멎는 듯했다. 선생님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까지 보니 나의 부모님께, 선생님께 너무 죄송했다. 이내 선생님은 내 등을 토닥토닥하시며 말씀하셨다.

  “ 다 사치야 사치…….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된 거지.  하기 싫어 안 하면서 변명거리 찾느냐 부모님 탓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 주어진 것에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거 욕심만 내면  더 힘들어지지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선생님은 너를 믿고 싶다. 아니 널 믿어. 잘 해왔잖아. 힘을 내.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응?"

 나는 선생님께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은 다시는 안 하겠다 약속드리고, 반성문을 제출하고 나왔다. 초겨울의 늦은 하굣길의 찬 회오리바람이 내 마음을 후려치더니 머리끝으로 터져나가는 듯했다. 그렇다. 내 불만은 사치였다. 지금껏 부모님 덕분에 살면서 감사한 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며칠을 끙끙 앓다가 이 모든 것이 진짜 다 내 탓임을 깊이 깨닫고,  긍정의 자세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학생다운 생활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올라가고, 남의 것만 같았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어 찾아왔고, 목표가 생겼다.

 난 성인이 되었고,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셨다. 대학으로 가셨다 하는데 그때 바로 연락드리지 못해 차일 피이일 미루다 연락이 끊어졌지만 선생님께서 해주신 주옥같은 말씀은 늘 귓전에서 맴돌고 있다. 더욱이 사교육 시장에서 18년째 교육의 엄중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없이 소중하다.

 항상 선생님은  마크 테카레 선생처럼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역지사지’를 선생님에게서 배웠고, 즐거울 때 기뻐하는 연습보다는 슬플 때 슬퍼하지 않는 연습을 배웠다. 사교육 선생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의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노력했기에 가능했다.

 밤늦은 퇴근길, 루루가 부르는 ‘To  sir with love'가 어김없이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해서든 수소문해 찾아뵈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여태 찾아뵙지 못하고 있으니 숙제를 다 하지 못한 학생처럼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달빛이 참 곱고 아름답습니다. 선생님이 내려다보고 계신 것 같아요.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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