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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이유    
글쓴이 : 오정주    25-05-31 23:01    조회 : 730

존재의 이유

모두가 외출하고 텅 빈 집, 고요한 정적 속에서 모처럼 침묵을 즐긴다. 음악도 쉬게 하고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있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피로가 스며들며 머릿속이 서서히 부옇게 흐려진다. 눈을 감고 말러의 교향곡 54악장 아다지에토를 들으니 몸이 은하수를 지나 외계의 어딘가로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온다.

그 순간,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일까? 이루지 못한 지난날의 꿈들이 한 장씩 책장을 넘기듯 스쳐 지나간다.

대학 입시의 실패로 남은 상처는 내 스무 살을 우울하게 물들였다. 그때 엄마가 호루겔 피아노를 사주며 집 떠나는 걸 붙잡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한 번 더 도전하지 않고 그냥 대학에 들어갔던 선택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한 후회로 남았다.

든든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비로소 방황이 끝났다고 믿었다. 어린 시절 막연히 꿈꾸던 행복과는 사뭇 달랐지만 아이의 작은 손끝에서 따스하고도 단단한 삶의 의미가 전해졌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이 내 안의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묻는다.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존재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존재에 대한 첫 의문은 열 살 무렵, 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불현듯 찾아왔다. 해질녘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문득 거울을 보니 낯선 얼굴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과 함께 이상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디선가 괴이한 소음이 들리는 듯했고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 느꼈던 낯선 그 감정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춘기를 지나며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되새기게 되었고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구체적인 고독과 우울감을 겪으며 삶의 회의를 품었다.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실체 없는 불안감이었기에 철학책을 읽으며 이유를 찾아보려 애썼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했다. , 우리는 무엇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 말에 처음 공감했던 것은 내가 느꼈던 막연한 불안과 허무감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자각의 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를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어쩌면 그 이유를 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새로운 불안을 낳기도 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철학책 속 문장들 사이에서조차 내가 누구인지 선명하게 마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해외살이를 오래 한 나는 비행기를 타고 3만 피트의 공중으로 떠오를 때 지상의 불빛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내가 하늘을 밟고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안개 속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쿠웨이트에서 두바이 공항을 거쳐 12시간 만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별세계에서 현실로 급격히 추락한 듯한 아득함이 몰려왔다. 익숙했던 서울은 낯설었고 우리집 거실은 납작해진 듯 했으며 안방의 침대는 땅 밑으로 꺼질 듯 가라앉아 보였다. 익숙했던 공간에서조차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묘사된 고독과 부조리가 떠올랐다. 물론 뫼르소처럼 자기 삶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하는 극단적인 고독과는 다르겠지만 냉장고를 멍하니 들여다보거나 커피머신의 검은 액체가 무엇인지 한참 떠올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한동안 주변 세계와 단절된 듯 불안을 느꼈다. 그저 시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순간이었을까.

하지만 단순한 생리적 반응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단순히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인간은 본질이 없기에 자유롭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 순간의 나는 본질 없는 자유가 아닌, 방향이 없는 방치 상태에 가까웠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처럼 일기를 쓰며 의미를 탐구했지만 나는 고장난 시계처럼 멈추어 섰고 세계는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만약 내가 카메라나 필통처럼 미리 정해진 본질을 지닌 존재였다면 적어도 누군가는 내게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존재의 무의미함과 무력감은 한참 후 시차에 적응하고 나서야 마술이 풀리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 감각은 마음속에 까끌한 모래알처럼 남아 때때로 나를 멈춰 세운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기 프랑스에서 무력 대신 글쓰기로 저항함으로써 사유와 실천을 일치시키려 했다.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맞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반항이라 정의했다. 인간은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지만 그에 맞서 반항하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부조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인간의 대응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반항, 사르트르는 선택을 강조했다.

결국 이들의 사유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인간은 주어진 본질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과 태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새겨 넣는 존재다.

어린 시절의 낯선 감각, 사춘기 시절의 방황. 그리고 성인이 되어 맞닥뜨린 무력감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카뮈의 부조리를 나의 삶 속에서 겪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했다면 성인이 되어서는 나는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방황을 한 것 같다. 결국 내가 찾는 것은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나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우리는 의미를 창조해야 하며 카뮈처럼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무의미한 삶에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반항이라는 이름 아래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안에서 내가 진정 자유롭게 의미를 창조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다.

나는 이제 존재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함을 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계속 질문하며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한국산문> 6월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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