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 6번 출구
봉혜선
집 앞 6호선 시발점이자 종점에서 출발한 전철을 동묘입구 역에서 인천·부천행 1호선으로 갈아탄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세 정거장 지나면 전철 3개 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다. 종로3가 6번 출입구는 글 교실로 통하는 길이다.
전철에서 내려서면 많은 사람들보다 먼저 마주하는 것은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둥들이다. 글로 가려는 길은 광장처럼 넓게 팔을 벌리고 맞이해주지 않는가. 광장이 있을 만한 넓은 장소가 비좁게 내리꽂힌 기둥들처럼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데로 치뻗으려는 마음을 다잡아야 하고 무엇을 떠받쳐야 하는가. 마음이 복잡해진다.
기둥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면 숨은 듯한 표 찍는 출구를 만난다. 검색대를 통과하듯 한명씩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입구인 것도 깨닫는다. 결연해 보이는 표정들을 훔쳐본다. 무엇을 피해 들어오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실행하려고 들어서는 중일까. 내 잣대로만 생각해서 출구라 여긴 걸 급히 반성한다.
세 명이면 꽉 차는 골목이 있다. 15번이나 되는 출입구 중에서 마주 오는 사람들을 피해 미로 찾듯 나의 출구인 6번을 향해 가는 길에 있는 골목길이다. 여전히 지하에 있는 그 길은 여느 길과는 다르다. 좋아하는 빨간 벽돌 벽으로 인해 푸근하다. 골목길은 글씨로 인해 환하다. ‘I♡SEOUL♡U 서울교통공사’가 걸어놓은 글들이 나를 인도한다. 글씨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는다.
‘운명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옵니다.’ 김제동 글. 이 길에 들어선 나에게 우연히 걷고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경구이다. 홀린 듯 운명이 이끄는 대로 걷고 있는 오늘에 딱 맞는 글이다. ‘어떻게 알았어?’ 라 생각하며 흡족한 마음을 앞으로 내민다. 잔상으로 남은 배경 사진은 붉게 물든 우람한 단풍나무. 빨간 벽돌 벽 색깔과 어우러져 지금 너무 나이 들지 않았다고, 너무 늦게 나오지 않았다고 위무해 준다.
다음은 자전거를 받쳐 두고 걷기에 나선 사람의 뒷모습 사진에 손 글씨로 프린트 되어 있는 하상욱 글. ‘지지 않는 것보다 지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인가, 더 좋다는 뜻이겠지. 결국 승리한다는 감탄이고. 말줄임표도 없는 생략문이 더 센 감동을 준다.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끝내본 적 없는 그간의 어리벙벙함을 알아주지 않던 남편에게 항변해 본다. 말줄임표를 읽어내지도 못하고 침묵이 얼마나 큰 울림인지도 알아주지 않던 남편에게, 비로소.
지치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읽게 된 세상의 소리다. 어느 순간에고 누구에게고 늘 져왔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을 뒤져본 적이 있다. 이기기 위해 졌는가. 한 번도 이겨보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때로 매우 지쳤으나 쓰러지고 또 쓰러졌어도 나는 일어난 것인가. 만신창이 된 마음으로 읽는, 반으로 이루어진 글이 나를 곧추세운다. 걸음에 기운이 실린다.
‘꿈은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지’는 짱구아빠 글이다. 달려 도망가는 눈에 비친, 길이 보이는 데도 찾지 않는 자에게 흐릿하게 보이는 그림이 배경이다. ‘난 안 될 거야, 난 못해, 내가 아니라도 좋지 뭐야’ 라고 물러났던 것이 양보가 아니라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고 싶었다. 무던히도 애를 쓴 나를 향한 글귀다.
하늘색으로 칠한 고택의 지붕과 담 사이에서 붉게 익는 신선한 단풍과 노란색 꽃에 쓰인 작가미상의 글귀는 이렇다. ‘당신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나란 말인가. 일반적인 것이 내게 닿으며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의 실체는 대개 이렇지 않은지. 눈물겹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생각보다 괜찮다고? 살기에는 급급했지만 그 핑계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변명하고는 했다. 그러나 괜찮았는가. 세상이 나에게 위로를 주려고 작당이라도 했단 말인가. 나에게 주는 위로의 글이 받기에 버겁다. 멈춘 걸음을 민다.
석양빛에 황금색으로 변한 나무들 위 맑은 가을 하늘에 새긴 ‘반짝반짝 빛나라 우리 인생’ 은 ‘동네형 글’이다. 나는 이번에는 ‘우리’에 사로잡힌다. 누구에게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라면 외롭지 않은 길일까. 그럴 수 있는 걸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글이나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우리 인생은 반짝이리라. 수많은 모래알처럼, 작렬하는 태양빛에 물드는 창문처럼, 수없이 뒤채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아침 바닷가의 윤슬처럼. ‘문우’라는 말이 그리웠다. 그를 찾아가는 길이다.
마지막 작자미상의 경구는 ‘내일의 걱정은 내일모레’ 다. 사진에 든 아이 눈사람이 털옷에 감싸여 따듯해 보인다. 눈사람이라고 따듯한 털옷을 입지 말라는 법은 없다. 법은 최소한의 것을 규제하기도 하고 보장하기도 하는구나, 또 깨닫는다. 그렇다. 마음속에 묻어둔 걱정은 내일모레로 미루어야겠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5프로는 쓸데없거나 불가항력이거나 혹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걱정을 해서 없어질 걱정이면 걱정만 하면 절로 풀리니 걱정은 얼마나 실체가 없고 힘이 없이 소모적인가.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기에도 능력 부족을 실감하니 걱정만 하던 생을 젖혀놓을 때다. 걸음은 더 빨라진다. 눈동자뿐인 눈사람에게 눈을 맞추며 6번 출구로 나온다. 길 끝은 모든 끝이 그렇듯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 글 교실로 걸어가는 100여 미터 남짓한 좁은 길에 들어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내 길을 찾아 나선 발걸음을 더욱 고무시켜 주는 골목길이 지름길이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다. 나를 향해 오는 사람은 모두 글 관계자인 양 내게 선한 미소를 보인다. 같은 방향의 사람, 사람들 역시 내가 가는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 발길은 내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휩싸인다.
새로 온 내게 이상한 눈빛을 내쏠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네, 접니다. 제가 오늘에야 왔습니다.’ 라고 말하면 나를 향해 격려할 사람들의 모든 뒷모습은 정겹기만 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향하는 나에게 든 주눅이 어깨를 툭, 친다. 이봐, 다시 한 번 살자고. 진짜는 이제부터가 아니야? 빛을 꺼내란 말이야.
길이 넓어진다. 날이 갰나 보다. 빛이 환하다. 군자는 대로행이다. 괜찮다, 괜찮다.
<<수필문학 2024, 8>>
전철에서 내려서면 많은 사람들보다 먼저 마주하는 것은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둥들이다. 글로 가려는 길은 광장처럼 넓게 팔을 벌리고 맞이해주지 않는가. 광장이 있을 만한 넓은 장소가 비좁게 내리꽂힌 기둥들처럼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데로 치뻗으려는 마음을 다잡아야 하고 무엇을 떠받쳐야 하는가. 마음이 복잡해진다.
문정희 시인의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다. 글을 쓰는 자세를 뒤돌아보고 정좌하려는 작가의 진지한 모습이 보인
다. 작가는 자문자답하지 않고 독자에게 답을 구하고 생각할 여지를 준
다. 질문하는 인간답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
는 사람이 있을까.
석양빛에 황금색으로 변한 나무들 위 맑은 가을 하늘에 새긴 반짝
반짝 빛나라 우리 인생'은 '동네 형' 글이다. 나는 이번에는 '우리'에
사로잡힌다. 누구에게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라면 외롭지 않은
길일까. 그럴 수 있는 걸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글이나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우리 인생은 반짝이리라. 수많은 모
래알처럼, 작렬하는 태양빛에 물드는 창문처럼, 수없이 뒤채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아침 바닷가의 윤슬처럼, '문우'라는 말이 그리웠다. 그
를 찾아가는 길이다.
인용하고 싶은 글귀가 많은 수필이었다. 이제 비로소 작가는 반겨주는
문우들이 있는 글교실에 도달한다. 작가는 '이봐, 다시 한번 살자고. 진짜
는 이제부터가 아니야? 빛을 꺼내라'고 한다. 어깨를 부딪치는 골목길은
좁은 길이 아니라 대로이다. '길이 넓어진다. 군자는 대로행이다.” 마
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김미원
kee3kim1@hanmail.net
<<한국산문 10월호 이 달의 수필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