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틱설탕의 음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가을 밤. 커피전문점 테이블에 놓여 있는 커다란 빈 종이컵. 그 옆에는 스틱설탕 세 봉이 처참히 허리가 잘린 채 널브러져 있다.
내용물이 탈탈 털린 빈 봉지들은 무슨 이유로 내 앞에 놓인 걸까? ‘상실의 시대’란 슬로건을 표현하려는 퍼포먼스의 주인공처럼 저리도 창백히 뻗어 빗소리에 처량히 젖어가고 있단 말인가?
저 종이컵은 어째서 초대형 사이즈인가? 컵 안에 묻은 우유 거품과 시나몬 가루는 왜 허기진 들짐승의 습격으로 처참히 털려 나간 것처럼 추레하게 남아 있는가? 오늘따라 컵에 그려진 크리스마스트리는 왜 이리도 얄밉게 뾰족한 걸까? 아아, 어찌하여 빗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오는가?
나? 나란 말인가? 진정 나란 말인가? 주문대 앞에서 카푸치노 특대 사이즈를 외치고 설탕 세 봉을 냉큼 들고 온 이가 바로 나, 나인가? 내 손으로 설탕 세 봉지를 가차 없이 동강 내어 카푸치노 속으로 투하시킨 것인가? 그러고는 사과를 베어 먹는 이브처럼 쾌락과 죄책감이 범벅된 표정으로 홀짝홀짝 들이마셨는가? 내, 내가 그랬다는 건가?
도대체 이유가 뭘까? 늦가을 밤비 때문인가? 빗소리에 공명된 심장이 나를 커피전문점으로 이끈 것인가? 아니면 집 앞 느티나무 때문일까?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심각한 질병에 걸린 건지, 요염한 노란색으로 물들지 못하고 비실비실 말라가는 가여운 잎들. 윤기가 사라진 잎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맥없이 ‘후두둑’ 떨어지자 내 마음도 ‘후두둑’ 떨어지는 것처럼 아팠단 말인가? 그래서 머리가 말랑해질 정도로 강력하게 단 커피로 위로받고자(아픈 위 때문에 술은 마실 수 없으므로)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왔는가? 가을비와 느티나무 때문에 쉽게 무너질 정도로 내 마음은 그토록 허기져 있었던 건가?
마음의 허기는 어디서 왔을까? 솔직해지자. 과연 마음의 허기가 맞을까? 소화기관의 허기가 아닐까? 설탕이 가득 녹아있는 초대형 카푸치노에 내 영혼을 팔 듯 유혹되어 이곳까지 온 것이 진정 날씨 탓이란 말인가? 병든 느티나무 탓이란 말인가? 포만감을 느끼고 싶은 소화기관과 단맛에 굶주린 혀의 욕구 때문은 아닐까?
최근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하루 만에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늘은 굳세게 결심하고 식단을 조절했다. 늦은 아침으로 베이글 반쪽과 원두커피 한 잔, 간식으로 사과 반쪽과 구운 고구마 작은 것 하나. 저녁으로 청국장에 밥 반 공기. 성공적이었다. 그리 크게 움직이지 않고 주로 가만, 가만히 지내는 내게는 적절한 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다. 오늘이 끝나가려는 지금, 나는 빈 설탕 세 봉지, 그리고 빈 대형 종이컵과 같이 있다!
나의 몸은 어찌 이리 변해가고 있을까? 무슨 이유로 다이어트라는 단어에 농락당하는 것인가? 그만 먹으라는 뇌의 강력한 명령에 사춘기 아이처럼, 청개구리처럼 소화기관은 꼭 이렇게 반대로 반응해야만 할까? ‘반항의 소화기관’이 되어 그만 먹으라는 뇌의 명령에 더 강력히 ‘미치도록 먹고 싶다’라는 반대 신호를 발산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나의 혀. 혀는 어찌하여 심심하다 찡찡거리며 수시로 단맛을 요구하는가? 십수 년 동안 교사로서 역학적 에너지보존법칙, 화학반응식 등을 지겹도록 나불거리다, 퇴직 후 폐업상태가 되니 그리 무료했단 말인가? 그 상실감을 먹는 행위로 풀고 싶었던 것인가? 소화기관의 반항심과 혀의 무료함이 이리도 무서웠던가? 둘의 연합이 가져온 시너지 효과에 쉽게 무너질 정도로 나의 이성은 허술했던가?
내 복부는 왜 이리도 쉽게 부푸는가? 어찌 자꾸 영역을 확장해가는가? 남편이 반했던 날씬한 허리는 다시 찾을 수 없단 말인가?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 덩어리가 되어가는 남편의 단단한 배를 바라보며 느껴지는 위기감은 어찌해야 하는가? 다가오는 건강검진에서 작년보다 늘어난 몸무게와 체지방, 허리둘레 치수를 보고 또 깜짝 놀랄 것인가?
어째서 옷은 점점 줄어드는가? 바지는 왜 나를 압박하는가? 최대치 힘을 견디고 있는 바지 단추는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힘겹게 잠근 청바지 허리 위로 툭 튀어나온 살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스틱설탕 세 봉지를 품은 대형 카푸치노! 너는 도대체 뱃속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살찌는 시대가 상실의 시대를 초래한 것인가, 아니면 상실의 시대가 살찌는 시대를 가져온 것인가? 빈 설탕 봉지들은 왜 저리 나를 노려보고 있단 말인가?
『수필과 비평』 202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