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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문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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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를 그리며    
글쓴이 : 문영휘    14-10-07 12:28    조회 : 7,527
         어버이를 그리며
   
                                                                    
                                                                                                                                        문  영  휘
  내가 살아온 지난 아득한 세월을 더듬어 반추해 본다. 손자 낳았다고 중풍의 노환에 계신 할아버지까지 나를 좋
아하셨다고 하나 내 기억에는 전혀 없다. 셋 살이 되면서 할아버지는 별세 하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도 왜
그리 안타까운지 알 수 없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은덕(隱德)을 받고 있기 때문일까?
  지금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나에게도 셋 살배기 쌍둥이 손주를 두고있다. 어여쁜 이네들을 귀여워하는 내 마
음이 그때의 할아버지의 정감에 비유될 수 있을까!  내 나이 아홉 살 어릴 때 어머님을 잃고 움츠리고 있을 때 감
싸주시던 할머님의 품에서 마음을 녹이던 일들은 아직도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다.

  시골에서 가난으로 공부를 깊이 못하셨다는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보릿고개까지 넘기기 힘겨웠던 시대에
도 아들 공부시키려 동분서주하시던 아버지! 그때는 요즘 같지 않아 과외나 외국유학은 상상도 못할 때지만 그랬
다. 그런 환경에서 나름대로 어린 내가 할 일이라곤 소를 치는 일 이었다. 그 소가 농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잘 키워서 내다 팔 때는 살이 쪄서 제값을 받아야만 나의 학자금에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다.
  아버지는 칠십 노구에도 힘들다 내색하지 않고 새벽녘에 일찍 일어 나셔서 이슬 맺힌 논두렁을 헤치고 다니며
물꼬를 돌보았다. 그렇게 심한 가뭄에 물 관리를 하다 한단 아래 논으로 도둑 물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 논 주인
과 삿대질하며 다툼을 하다 넘어지셨다. 그때 각진 돌에 이마를 찍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되고, 또한 농사일
에 손발이 불어터져 물집이 생기고 갈라져도 누구에게 이야기 한번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끼니걱정을 하시던 아
버지. 흉년이 들던 해에 먹거리가 달렸으나 하늘을 원망하기에 앞서 이웃마을 서당 친우에게 어려운 부탁으로 양
곡을 장기 차용하여 소(牛) 등에 싣고 와야만 했던 일. 그렇게 힘겨웠지만 항상 의(義)롭게 사시던 아버지!
 
  나는 철없이 우리가 살던 곳 보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원했지만 조용히 한 말씀은 11대째 주민들이 뜻을 모아
살고있는 이 곳을 두고  우리같이 떠나간다면 누가 이 지역을 가꾸고 지키겠느냐? 하시던 그 말씀이 50수년이 지
난 이제야 깨닫게 되니 늦다 하기보다 아버지의 뜻을 조금도 이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찌 부모를 모셨다고 말 할
수 있으랴! 다사(多事) 다난(多難)한 사회에 진출하여 출세하고 부모의 이름을 높이고 사회적 위상을 올려 드리는
 것도 효라고 하는데 그마저 하지 못하고 일자리에 급급하여 별세하실 때는 임종마저 하지 못하였으니 분명 나는
 나도 모르게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그때는 후진국이어서 미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CD사업(지역사회개발)을 위한 일자리를 따라 울산 남쪽 대현, 세
현 지구에서 보조금을 주고 해태(海苔) 양식을 할 때 다. 바다 한복판에서 발을 치고 일에 열중하던 중 해변 멀리
서 빨리 나오라는 손짓에 어쩌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왔다.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말을 전하며 빨리 고향
집에 가보라는 이야기다. 순간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서 열차시간도 기다리다
못해 독한 고량주 몇 잔을 먹고 진정을 시켰으나 듣지 않았다. 계속 마음 조이며 열차를 타고 간신이 고향집에 들
어 설 때는 정적 한 분위기에 일가 친척이 모두 모여 걱정을 하고 있었다.

  큰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들 영휘가 왔다는 고모님의 말씀에 아버님은 얼른 얼굴을 돌려 눈을 뜨고 저를
보시며 “왜 왔냐, 나는 괜찮다.” 하시던 아버지!
 저는“생각보다 많이 좋아 보이시네요”하고는 서로가 말문이 막혔다.
   계속된 형님의 보혈주사에 회복이 되어 이틀째도 병세는 요행(僥倖)이 더욱 회복기미다. 앞으로 오랜 기간 더
 지탱하실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장기간 일자리를 비울 수 없어 하던 일터로 내려갔다 다시 오겠다고 여쭈었더니
아버지는 “나 생각은 말고 내려가서 맡은 일을 성실이 하라”는 것이었다. 아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일터에 되돌아가자마자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위독하다는 전갈(傳喝)을 받고 청도 집에 들렸을 때
는 벌써 울음소리가 담을 넘고 이미 아버지는 눈을 감고 계신 것이 아닌가! 부자간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
고 가시게 된 것이 결국 잊지 못할 한이 되었다.
 그 후에 일터에 다시 갔지만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웃 지도자의 포근한 위로에 모든 것을 잊고, 이후
 전국을 휘젓고 월급쟁이 사업을 한답시고 돌아 다녀도 정녕 내 고향은 뒷전에 두고 있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제약된 생활에 자의(自意)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퇴직 후 고향에 보탬을 줄 형편도 아니라
고 변명도 할 수 없는 마음뿐이었다. 어쨌든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혀온 지혜를 보태고 싶었으나 그것도 마음 같지
않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실 것을 생각하니 빈둥댈 수도 없는 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해보지 못한 자책감에서 그래도 간신히 아버지의 뜻을 이어보고 싶었다. 겨우 일의 실마리를 찾아 처음 알게된 것은 아버지 젊어 실 때 받으신 효행 상이다. 그 상은 공부자 성칙묘에서 발표한 포창완의문이다. 중국 한(漢)나라 효자 영숙(潁叔)과 오(吳)나라 육적(陸積)에 비유한 효자임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를 따를 수도 없고 겨우 취(取)한 것은 《우리의 맥(脈)》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우리의 효》란 책을 엮어서 마음을 전하는 일 뿐이었다. 이것이 효행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지난날과 달리 여건이 변한 시대에 효 문제를 한 집안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공동체생활의 문제로 다루어야하는 것으로 여기고 보탬을 주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이웃만이 아니고 멀리 있어서 효행을 할 수 없는 자녀들의 효행과 별세 후라도 못다 한 일을 해야한다는 효의 길을 바로 알려서 옮겨 볼 수 있도록 하는 희망의 효복(孝福)운동이다. 그러나 버스 지나간 후에 손 흔드는 격이 되어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퇴직 후 제2막 인생을 살면서 일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은 책 한 권이라도 내게되고 보니 한결 그 보람으로 부끄러움을 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위(自慰)를 하여본다.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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