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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그 프로젝트를 만나다    
글쓴이 : 소지연    17-05-14 12:01    조회 : 5,613

  여름이 시작되던 날에 나는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불손한 손님처럼 섭씨 100도의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 것이다. 극도의 열기가 뼈와 살을 뚫고 깊숙한 데까지 파고들자 나는 총 맞은 사람처럼 후다닥 양말을 벗겨내고 벌건 부위에다 얼음덩이를 얹었다. 잠깐의 반사작용인줄 알았던 통증이 한참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아 뒤져 본 검색 난에는 아뿔싸! 급격한 얼음찜질이 잘못 된 응급조치로 나와 있지 않은가. 그냥 차가운 물만 흘려 부었어야 했는데 때를 놓치고 말았다. 벌써부터 강낭콩만한 물집이 부풀어 오르더니 타원형의 집을 짓는다. 자신의 세계를 알리는 완벽한 요새, 그 말랑하면서도 탱탱한 수포가 아예 건드릴 생각일랑 말라는 듯 손만 대면 튕겨 오른다.

  상처는 터뜨려야 빨리 낫는다는 말이 있다. 원초적 세포들이 송두리째 뿌리를 드러내고 한참씩 바람에 시달려야 새 살이 돋는다는 얘기다. 표피 안쪽 깊숙한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예리한 성장 통을 치르며 켜켜이 옷을 입어 갈 때, 그건 아마도 생존을 향한 필사적 몸부림이리라. 새로운 보호막이 덮어 줄 때까지 차가운 대기 속에 얼마나 떨어야 할까.

  나는 차라리 거북이걸음을 택하기로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걸 건드려 바늘 같은 통점들을 일으킬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타격을 받은 부위가 스스로 드러나 주기 전에는 이 쪽에서 터뜨리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덮고 가자는 나만의 처방이 돈키호테 식 발상이라 해도 좋으니 일단 유효하기만 하다면 기적이리라. 방패 안에 숨어 있는 가녀린 생명들이 제 박자대로 치유의 행보를 이어가다 어느 순간 껍질까지 꿀꺽 흡수해 버리면 그만일 것이었다. 나는 단지 물집이 말라 흔적도 없어 질 때까지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면 되리라.

  거북이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마음에 깊은 고뇌가 있어 보이던 한 목소리가 기억을 뚫고 다가왔다.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바람이 평온한 날이면 이렇게 잊어도 될까 싶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사람이다. 어제처럼 섭씨 35도를 오르내리고 습기가 구석구석 배어 있던 마닐라에서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뒤늦게나마 내 가족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고 생소하기만 한 위기 전화 상담원일을 자원했다. 6개월간의 필기와 사례를 경험하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상담지침을 답습하는 세미나까지 열어가며, 순번에 따라 전화선을 타고 오는 긴급 콜을 받았다. 그 당시, 보금자리가 빈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Habitat( 집짓기 운동)’도 있었지만, 내게는 미 영사관과 부인회가 주최하는 이 'Crisis Line(긴급전화)‘이 어필했던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크라이시스 라인입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무적으로 운을 떼자 약간의 침묵 끝에 나지막하고 쉰 듯한 목소리가 흐른다, 지나치듯.

 " 차리스 라고 해요. 차리스 로페즈......”

   간헐적인 기침소리엔 어떤 불신에서 오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얼굴도 모르는 전화선 끝의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했을까.

  "하이 챠리스! 오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냉랭하게 들리지 않도록 나는 어깨의 긴장을 풀어 본다.

  "담배가 태우고 싶어 죽을 지경이랍니다. 저는 지금 길에서 공중 전화통에 계속해서 동전을 넣고 있어요, 목이 타는 군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이럴 때 다그치듯 캐묻는 건 금물이다. 상담원의 역할이란 의뢰자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이어갈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이다. 이 쪽이 듣고 있다는 신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그녀는 가장자리만 맴돌다가는 서서히 고뇌의 핵심으로 다가 가곤했다. 21세의 싱글여성, 가톨릭 영세자이지만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부모 형제와 심한 갈등 끝에 따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나는 맞장구만 쳐 줄 뿐 어떤 원초적 감정도 건드리지 않으려 망을 봤다. 전파를 통해 조금씩이나마 고통을 잠재울 수 있기를 염원했을 뿐이다. 그녀와의 대화가 여러 날에 걸쳐 반복 될 때 마다 얼마나 그 깊숙한 상처의 비밀 휘장을 열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모른다. 때로는 그녀 쪽에서 내가 먼저 열어 봐 주기를 바라는 것도 같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영원한 신비의 판도라 상자는 그렇게 묻어두었던 거다.

  그해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나는 고국으로 돌아올 짐을 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걸려온 통화에서 그녀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내게 Bon Voyage(여행 잘 하세요)를 고했다. 시간과의 싸움을 거치며 많은 것이 녹아내린 듯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생기가 돌고 있었다.

  " 지금 무엇이든 먹고 싶은 데 수중에 한 푼도 없답니다.”

  “ !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상담원에게 허용된 최대의 개입이었다.

 " 부모님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제 들어가기로 작정했어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의외의 빠른 결정이 놀랍고도 반가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드물게는 상담원이 얼굴을 드러내고 물리적 도움 까지 뻗친 사례도 있었다지만, 우리만의 온건했던 힐링의 여정은 아직도 하나의 신비가 되어 내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다간 오늘 같이 비가 흩뿌리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공중전화 앞에서 신음하던 그녀의 숨겨진 상처가 귓가에 맴돈다. 이후에도 잘 풀리고 잘 살고 있는지......

  그녀의 회복이 영구했을지 알 수는 없어도, 오래 신음해 온 내 발등이 그다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는 그녀와 함께 거닐었던 완만한 트래킹의 기억도 일조를 했을까. 한 달이나 넘어 표피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 나는 커다란 프로젝트라도 치른 듯 으쓱하며 일상 문을 열어 젖혔다.

  "터뜨리지도 않았는데 다 낫고 말았어요! 표도 나지 않아요!”

  상처야 말로 터뜨리지도 말고, 애초에 입지도 않는 것이 나에겐 최상이다. 그래도 시간이란 고마움이 있어 안타깝고 억울한 상처의 속사정을 달래 준다는 사실을 아는가. 언제고 새로운 타격이 다가오면 나는 또 다시 그 죄 없이 심난한, 상처란 프로젝트를 등에 업고 거북이의 기적을 염원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못내, 지금쯤 아이 엄마 되어 다른 이의 상처를 보듬고 있을지 모를 처녀 하나를 그리워하며 물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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