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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와 나와    
글쓴이 : 홍정현    19-02-20 21:21    조회 : 5,179

                                                          거미와 나와

                                                                                                                      홍정현

  ‘앗, 저건 뭐지?’

  요즘 ‘핫(hot)한’ 커피전문점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허공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노트북 위에 검은 점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비문증이 있어서 눈앞에 벌레 같은 점들이 보였다. 나이가 들면서 벌레들은 점점 증식하여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다. 처음엔 노트북 위의 점도 비문증이 만든 벌레 무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비문증 벌레라면 내 시선을 따라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 점은 같은 위치에서 가볍게 흔들리고만 있었다.

  ‘헉, 이건 진짜 공중에 떠 있는 점?’ 흠칫 놀라 미간에 힘을 주고 자세히 보려 했다. 하지만 점이 흐릿해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노안 때문에 가까운 것들이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노안이 있는 나이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몸짓인, ‘고개를 뒤로 뺀 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보는’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작은 거미였다. 빛에 반사되어 겨우 보이는 가느다란 거미줄 끝에 거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이가 많아지니 쓸데없는 호기심이 자주 발동한다. 거미줄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 고개를 들고 올려 보았다. 거미줄은 천장부터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높이가 꽤 되어 보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벌레 공포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벌레를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무서웠던 것들이 점점 덜 무서워진다. 예전엔 벌레를 보면 소리를 지르고 벌레 근처에 가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벌레를 봐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특히 무당벌레, 애벌레, 집거미 등 해충이 아닌 벌레를 보면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것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옮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측은’의 감정 영역은 넓어진다. 잎이 말라가는 집 앞 느티나무가 한없이 불쌍해 보이는 것은 기본이요, 낡은 벤치 같은 무생물에도 측은지심의 눈길을 보내는 경우가 생긴다. 아차,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벌레 얘기로 돌아오겠다. 나이가 드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져 자주 샛길로 빠진다.

  심지어 나는 돈벌레라 불리는, 다리가 많아 징그러운 그리마의 출현에도 혐오감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집에 독일바퀴가 자주 들어와 해충방지업체 관리를 받고 있다. 그곳에서 파견된 키 크고 잘생긴 젊은 남자 직원이 “그리마는 바퀴벌레 같은 해충을 잡아먹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이후로는, 집 안에서 그리마를 발견해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담담하게 대처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담담함’의 영역도 넓어져, 작은 일에는 놀라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모니터 위의 작은 거미도 해충이 아니므로 겁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거미의 위치가 문제였다. 거미는 글쓰기 작업을 방해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저 거미를 어찌해야 할까? 거미집을 짓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으로 한없이 내려오고 있는 거미가 안쓰러웠다. “여기는 아니다. 여기는 적당하지 않아. 너 어쩌려고 이리 왔냐?” 이런 혼잣말을 하며 거미를 바라봤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상하게 혼잣말이 자연스러워진다.

  내가 거미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테이블이었다. 그동안 자주 드나들며 경험으로 터득한, 글쓰기 최적의 자리였다. 편한 의자, 넓은 탁자, 적당한 채광, 공원이 보이는 전망, 그리고 직원과 가깝게 있어 나의 귀중한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안심되는 곳. 나이가 들면, 자리에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엔 좋은 자리가 좋은 글을 만든다는 나름의 고집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은 고래의 힘줄처럼 질겨진다.

  그러므로 거미를 이동시켜야 했다. 죽이지 않고 살포시 녀석을 옮기기로 했다. 거미가 달린 거미줄을 끊어 소파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 살짝 놓아주면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미줄을 손으로 만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벌레 공포증을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극복 중이었다. 벌레를 만지는 것은 여전히 고역이었다. 거미줄도 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푸치노가 담긴 일회용 컵의 뚜껑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 연륜이라는 것이 생겨 주변 도구를 잘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것으로 조심스럽게 거미줄을 끊었다. 그런데 줄이 끊기자, 반동으로 거미가 컵 뚜껑 안쪽에 부딪혔다. ‘이런!’ 나는 뚜껑 안쪽을 살폈다. 거미는 그곳에 붙어 버둥거리고 있었다. 뚜껑 안에 묻은 두꺼운 카푸치노 우유 거품에 빠져….

  카푸치노의 우유 거품은 밀도가 높아야 맛있다. 그 커피전문점의 우유 거품은 특히 진했다. 묵직했다. 그래서 자주 마셨는데, 그 거품이 거미에겐 치명적인 죽음의 지옥이 되어버렸다. 거미는 거품에 포획당한 채, 살겠다고 다리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처음엔 거미가 저곳에서 죽어가는 것이 내 책임은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품 안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다리를 휘젓고 있는 거미를 보니 한없이 가여워졌다. 내가 ‘바보 같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렇게 자책하다가 문뜩 이런 상황이 왠지 코믹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TV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성격이 급해 늘 실수를 유발하는, 감정 표현이 십 대 소녀처럼 과한 중년 여자가 나오는 시트콤. 하지만 거미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또 반성되었고, 집 곳곳 해충퇴치업체 직원이 놓은 트랩에 붙어 죽은 거미들이 떠올라 이런 반성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모레가 오십인데, 감정 정리를 못 하고 쩔쩔매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상반된 여러 생각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면서 서로 충돌했다. 끝없이 쓰러지는 도미노 조각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재즈가 흐르는 세련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 컵 뚜껑 안의 작은 거미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나의 마음은 한곳에 정박하지 못한 채 파도에 휩쓸려 여기저기 부딪히며 부서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건만, 별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좋은수필?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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