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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동풍(馬耳東風)    
글쓴이 : 백두현    19-02-21 15:55    조회 : 600

마이동풍(馬耳東風)

백두현

 

어김없이 올 정초에도 떡국 한 그릇을 후딱 비웠다는 기억이다. 그 대가라야 기껏 나이 한 살을 더 먹은 게 다였지만 별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식의 대가가 나름 좋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점 덩치가 커지는 거였고 누군가의 간섭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되는 성숙의 개념이라 내심 뿌듯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역할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다스릴 부하들이 하나, 둘 생기는 과정이라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좋았던 기억들은 하나씩 줄어들고 우울하게도 피부의 탄력이 없어지거나 머리색이 하얗게 변해가는 등, 대개가 지키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곱씹어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호칭의 변화다. 어릴 적은 주로 웃자는 애칭으로 불리고 장년기에는 꼭 필요해서 나를 찾던 호칭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럽게 불린다는 생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버님이라는 호칭이다. 물리치료차 병원에 가면 간호사들이 아버님, 이리 누우세요.” 하고,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에 가도 아버님, 이리 앉으세요.” 한다. 모처럼 외식을 하거나 쇼핑을 할 때도 처음 대하는 나를 아버님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부른다. 회사에 가면 직책이 있으니 직책대로 불리고 작은 모임에 가면 회장님이라고도 불리지만 처음 만나는 타인들이 날 그렇게 불러줄 리 없다. 기실 아버님 정도면 호칭이 무난하다는 생각이다. 뭐 홀아비로 늙지 않고 평범하게 남들처럼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말이니 억울할 것도 없다. 자식 복도 없지 않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산다는 정도의 호칭이라 불편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참 묘하다. 내 나이에 어울리는 호칭이거니와 막연하게 존칭이란 것도 인정하지만 마냥 달갑진 않은 이유가 뭘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표현이라 유쾌하지 않은 것 같다. 좀 간지럽기는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기에 들어봤던 젊은 오빠란 호칭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대충 존중해주는 표현 같기는 한데 왠지 성의 없게도 들린다. 승호 아버님!’하고 부르면 무척 살가울 것 같은데 그때마다 그들에게 자식 이름을 미리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럭셔리하게 멋진 아버님! 하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뉘라서 그렇게 배려심이 충만할까.

그런 내게 더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주 속이 안 좋아 내과에 들렀는데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계속해서 아저씨는 간이 안 좋으세요. 아저씨는 술 드시면 안돼요. 하고 계속 아저씨 타령을 해대는 게 아닌가. 기껏 서너 살 아래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내과의사가 줄기차게 아저씨 타령을 해대는데 왜 그렇게 언짢던지, 이 병원 돈 벌기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라는 사람이 . 몰인정하기는. 선생님 호칭이 아까우면 맘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아버님 정도라도 불러주지, 나 역시 의사아저씨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님도 그런대로 괜찮은 호칭이라는 것을.

그래서 요즘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는 중이다. 아니 내 마음대로 들어버리는 단련을 하고 있다. 아버님! 하고 부르면 막내아들처럼 아빠! 하고 부른 것으로 들어버리는 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라는 존재를 누군가 필요로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아니면 아버지! 하고 부른 거라고 들어버린다. 그러면 군에서 제대한 큰아들이 철이 들어 불렀을 때 느낌이 떠오르는 게 나쁘지 않다. 기왕이면 아저씨보다는 아버님이라고 불러주지, 아버님보다는 선생님이 나을 텐데, 하고 살짝 원망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귀를 어둡게 해 마음을 정화시키는 훈련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 아버님 정도만 불러주면 이제 이해해 주기로 하자. 아직 어르신이라고 불리지 않는 게 어딘가. 극존칭일 것 같지만 쓰임새가 거의 바닥났다는 의미로 들릴 것 같은 어르신 소리는 절대 듣지 않아야지. 아무렴, 아버님이 어때서. 아직은 힘이 조금 남았다는 뜻일 거야. 이제부터는 듣고 싶은 대로 들어가며 정을 붙이는 거다.

빨간 불이예요. 아버님! 조심하세요.”

미장원 가는 건널목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 기분이 좋다. 부축해주지 않고 말로 소리치니 아직 방해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고 아버님, 염색 좀 하셔야겠어요.”

미장원에 도착해서 들리는 소리도 와! 기분이 좋다. 머리 자르다말고 매출 좀 올리자는 장사속이니 아직은 내 지갑이 차 보이는 거다.

나이를 먹어가는 말의 귀에 바람이야 불건 말건 내년 설에도 떡국 한 그릇을 기꺼이 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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