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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홍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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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글쓴이 : 홍정현    19-04-14 13:48    조회 : 1,242

 그거

 

 

                                                                                                                        홍정현

 

  “이 커피 향 좋다. 어디 거니?”

  “진짜 좋네. 어디서 샀어?”

  집에 놀러 온 정원과 경선이가 커피 브랜드 이름을 물었다.

  “좋지? 그게 그러니까 그거…, 그거인데…. 뭐더라. 그거인데….”

  내가 커피 브랜드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하자, 경선이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됐어. 너무 애쓰지 마.”

 

  둘은 고등학교 2, 3학년 내내 나와 같은 반이었다. 강제로 해야 했던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나는 저 녀석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었고, 쉬는 시간엔 몰래 도시락을 같이 ‘까먹으면서’ 진한 동지애를 체험했으며, 짝사랑하는 국어 선생님이 내게 말이라도 건 날엔 호들갑을 떨며 녀석들에게 자랑을 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으니, 거의 삼십 년이다. 그러니까 이 친구들은 내 삼십 년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허세 가득 ‘똥폼’만 잡고 다녔던 십 대부터, 여전히 그 ‘똥폼’을 다 버리지 못해 슬쩍슬쩍 흘리고 다니는 사십 대까지, 내가 저지른 미성숙한 행동과 내가 당한 굴욕적인 경험들을 모두 지켜본 친구들이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워 싹 다 지우고 싶은 일들을 녀석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 내 ‘찌질한’ 과거를 녀석들이 기억하고 있으니, 나는 죽어도 놔줄 수 없다.

  물론 나도 친구들의 쨍했던 청춘 시절부터, 나름의 연륜이 쌓인 지금까지의 일들을 알고 있다. 그동안 녀석들이 지나온 시간들, 환한 기쁨의 순간과 깊은 낭떠러지 같은 좌절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안타까운 것은, 친구들은 나와 달리 워낙 진중한 성격이라 굴욕적인 과거가 없다는 것. 그래서 억울하게도 나는 그들을 놀릴 수가 없다.

  그 시간들이, 우리를 지나갔다. 시간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고 흘러갔다. 차곡차곡 쌓인 흔적은 단단하게 굳어 우리만의 정서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에는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다. ‘척하면 착!’ 하고 알아듣는다. 내가 교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수필을 쓴다고 했을 때(난 문학과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물리 교사였다)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은 ‘오, 그래?’라고 반문했지만(심지어 묘하게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이날 우리의 대화 속에선 자주 ‘그거’가 등장했다. 착한 ‘그거’는 잠시 후에 망각의 늪에서 ‘짠’하고 빠져나와 답답한 우리의 가슴을 뻥 뚫어주었지만, 못된 ‘그거’는 끝까지 망각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된 ‘그거’라 해도, 우리 대화를 방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거’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어도 ‘그거’가 바로 ‘그거’임을 알았다. 혹 모르더라도 모르는 ‘그거’ 따위, 바로 무시했다. 내가 커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할 때 녀석들은 웃으며 애쓰지 말고 ‘그거’를 그냥 ‘그거’로 두라고 했다. 확실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설명하지 않고 모른 채 지나가도 괜찮다고 했다. 그 커피 이름은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한참 뒤에야 슬며시 떠올랐다.

 

  우리 집 현관을 나서며 정원이가 말했다.

  “잘 있어. 다음엔 낙원동 가서 아까 말한 그거…, 먹자. 그거…”

  “그래, 그러자.”

  나도 경선이도 맞장구를 쳤다. 다음번 우리는 낙원동에서 그거를 먹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 것이다. 살이 몰캉한, 빨갛게 양념이 되어 있는, 콩나물과 같이 큰 접시에 푸짐하게 담겨 나오는 그거. 녀석들이 내 ‘찌질한’ 과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나는 얼른 그거를 녀석들의 입에 쑥 넣어줄 테다.

 

 

《문예바다》 201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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