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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가 달린 마침표    
글쓴이 : 홍정현    19-04-14 14:02    조회 : 1,275

꼬리가 달린 마침표

                                                                                                             홍정현

 

 

  박형준의 ⟨책상⟩이란 시 첫 행이 이상했다.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바람의 냄새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속에/얼굴을 묻고 대양을 꿈꾸지요

                                                                                           - 박형준, ⟨책상⟩ 중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이 부분 말이다. ‘위로’ 다음에 찍힌 마침표가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곳에는 없는 마침표가 왜 이곳에만 있을까? 이건 뭘까? 혹시 먼지가 묻은 것인가? 아니면, 인쇄 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찍힌 것일까? 잘 보기 위해 머리를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이 가니 더 보이지 않았다. 눈 바로 앞의 점은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뿌옇게 경계선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뒤로 물러나야 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눈과 시집 사이를 멀리 하니, 점은 그나마 조금 덜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표라고 생각했던 점에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쉼표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내게 노안이 왔나? 내 눈이 노화한 것인가? 수정체는 늙어 두터워지고, 주변 근육은 탄성을 잃어 수정체의 두께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날 이후, 마침표와 쉼표의 구분 능력을 상실한 나는 늙은 수정체를 의식하며 책을 읽어야만 했다. 글을 읽을 때마다 글자 오른쪽 아래에 붙어 있는 흔들리는 점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뒤로 빼고 눈을 찡그려야 했다. 그것은 독서의 부드러운 흐름을 방해했다. 도로 위의 방지턱을 넘을 때처럼 덜컹거리게 했다. 예를 들어 김정란의 ⟨사건X⟩같이 쉼표와 마침표가 많은 시를 읽을 땐, 계속되는 방지턱으로 덜컹, 덜컹 방해를 받았다.

 

 갑자기(덜컹) 아이고 아파(덜컹) 엄마 아버지(덜컹) 나 아파(덜컹) 흑흑/하고 울기 시작했거든(덜컹) 저런(덜컹) 가엾은 바위(덜컹)

                                                                                       - 김정란, ⟨사건X⟩ 중

  덜컹거림은 시의 리듬감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노안에도 익숙해졌다. 사십육 년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문장 속 쉼표와 마침표를 자연스럽게 구분해 스르륵 읽어갔다. 마침표가 있을 만한 곳과 쉼표가 있을 만한 곳을 경험에 의존해 빠르게 짐작하고 넘어갔다. 방지턱의 덜컹거림은 곧 마모되어 사라졌고, 다시 부드럽게 흘러가듯이 시의 리듬을 느껴가며 글을 읽었다. 덜컹거림투성이었던 김정란의 시도 단번에 읽게 되었다.

  갑자기, 아이고 아파. 엄마 아버지, 나 아파, 흑흑/하고 울기 시작했거든. 저런, 가엾은 바위.

 

  이렇듯 덜컹거리는 방지턱 없이, 시인이 의도한 시의 맛을 온전히 느껴가며 ‘쓰윽’ 읽어 나갔다.

  늙은 수정체를 가지고도 쉼표와 마침표를 노련하게 구분지어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한 후, 김정란 시집을 덮으려는데, 뭔가 찜찜했다. 이렇게 자신해도 되는 걸까? 자신감의 미세한 틈새로 의심이 파고 들어왔다. 중학교 교사 시절, 나의 별명은 ‘의심의 여왕’이었다. 거기다가 최근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미국 물리학자)의 책과 김상욱 교수(물리학자, 경희대학교 교수)의 강연을 통해 ‘의심’의 중요성을 읽고 들었기에(물론 과학자의 태도에서 의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지만), 찜찜함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책장에 꽂으려고 했던 시집을 다시 열었다. 방금 읽었던 시를 찾아, 눈과 글자 사이 거리를 잘 조절해가며 찬찬히 들여다봤다. 아이고, 이런! 의심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사건X⟩엔 마침표가 하나도 없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찍은 쉼표를 나는 마침표로 알고 넘어갔던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의 독서는 미세한 오독(誤讀)들로 넘쳐났을지도 모른다. 잠깐 숨 고르기를 할 곳에서는 끝났다고 멈춰버리고, 끝난 부분에서는 잠시 쉬는 줄 알고 머뭇거리다 다시 나아갔을 거다. 물론 텍스트 내용 파악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시인의 세심한 의도를 왜곡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인들은 쉼표 하나도 그냥 습관적으로 찍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맑은 백김치에 잘못 들어간 시뻘건 고춧가루 몇 점을 바라보듯, 기운이 빠져버렸다.

  나이가 드니 마침표는 자꾸 꼬리를 늘어뜨리려 하고, 쉼표는 꼬리를 자꾸 숨기려 했다. 탄성의 유연함을 잃어가는 나의 눈은 사물을 흐릿하게 뭉개고 있었다. 어렸을 땐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고 판단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눈의 노화가 가까운 사물에 대한 시각적 판단을 오류투성이의 정보로 만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눈만 그러할까? 나의 뇌는? 눈이 노화되고 있다는데, 뇌라고 팔팔한 청춘이겠는가? 뇌도 노화가 시작되었겠지. 탄력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져가고 있겠지. 그러니 나의 뇌가 판단한 것들, 그것들도 어쩌면 가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거나, 진짜 꼬리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하다고 여긴 내 생각과 판단, 의지 속에는, 탄성을 잃고 고집쟁이가 되어 버린 늙은 뇌가 만들어낸, 온갖 오독(誤讀)들이 득시글거릴지 모른다.

  오독, 오독, 오독! 그러니 의심의 여왕, 의심의 돋보기를 들고 뇌를 점검하라. 굳어가는 뇌가 나를 꼰대로 만들지 않도록!

 

 

 

《인간과문학》 201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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