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물다 사라질 생각
홍정현
그 시추 개는 너무 뚱뚱했다. 몸통에 붙은 짧은 네 다리는 체중을 지탱하는 데에 역부족으로 보여 안쓰러웠다. 시추를 데리고 다니는 할머니는 유럽 집시들이 입을 만한 옷차림에 등까지 내려오는 흰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고 다녔다. 할머니는 어깨가 조금 굽고 체형이 왜소했는데, 이런 모습은 옆에 있는 시추를 더 뚱뚱하게 보이도록 했다. 할머니와 붙어 다니는 시추는 제 몸의 무게가 버거운 듯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느리게 걸어가는 시추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앞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것 같았다.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눈을 돌리는 다른 개들과는 달리, 그저 걷는다는 행위에만 충실하겠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표정 말이다.
우리 동 옆 라인에 사는 할머니는 수시로 밖에 나와 있었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상가 주변을 산책하거나, 요구르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끔은, 사실 내가 느끼기엔 자주,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불법주차 중인 차주, 어묵을 먹고 긴 꼬치막대를 길에 버리는 초등학생, 자전거를 타고 인도에서 빠르게 달리는 중학생 등등 다양했다. 할머니의 고함은 보통 할머니들이 지르는 소리와 달랐다. 굵게 갈라지는 저음이 늘어지지 않고 곧게 뻗어나가 어딘가에 ‘퍽’ 하고 부딪히는 듯한, 한방에 강렬하게 터지는 소리였다.
할머니 윗집에 살다 이사를 간 동창 친구는 할머니가 수시로 자기 집 초인종을 눌렀다고 했다. 청소기만 돌리면 시끄럽다고 올라와 소음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한참 하고 내려갔다고…. 할머니는 동창 집 인테리어를 트집 잡으며 자신 집처럼 잘 꾸미고 살라고 충고까지 했다는데, 실제 할머니의 집에 가보니 오래된 장식품이 가득 늘어져 있어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동창은 할머니 집을 태극기 집이라고 불렀다. 베란다에 거대한 태극기가 있다고. 태극기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파트 앞을 왔다갔다했는데 태극기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들은 후, 아파트 앞에서 할머니 집을 바라보니 베란다 창문에 정말 대형 태극기가 있었다. 색이 바랜 태극기는 원래 거기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왜 몰랐을까? 저렇게 큰 태극기가 3층 창 전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데….
몇 달 전, 아파트 앞 인도에서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를 발견한 나는 나도 모르게 할머니 옆을 살폈다. 그런데, 없었다. 시추! 시추가 없었다. 시추가 설마? 시추의 행방을 알고 싶었으나, 그냥 할머니 앞을 지나쳤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편이지만,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할머니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창에게 했듯이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장황하게 늘어놓을 게 뻔했다.
할머니는 그 후 계속 혼자였다. 벤치에 앉아 있거나, 요구르트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혼자 다니는 할머니의 걸음은 어딘지 전과 달라 보였다. 어쩐지 조급해 보였다. 실제 걸음이 빨라진 것은 아닌데, 자꾸 서두른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또, 집 안까지 쩌렁쩌렁 파고들었던 할머니의 고함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왜 이제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지만, 나는 할머니를 멀리서 관찰하기만 했다. 요구르트를 사면서 아주머니에게 할머니에 관해 물어볼까 하다가도 그만두었다. 이웃에 관한 나의 호기심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에게도, 아주머니에게도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렇게 궁금한 것들을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지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침, 한파로 꽁꽁 언 창밖 거리를 바라보다, 떠올랐다. 최근에 할머니를 본 적이 있었던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다. 겨울이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채, 두꺼운 누비 외투를 두르고 다니는 할머니를 이번 겨울엔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할머니 집 태극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나는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주변을 자세히 살피는 버릇이 있는데도, 모르겠다. 기억에 없다. 할머니도 태극기도….
태극기가 여전히 붙어있었다면 그것은 창의 일부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워 태극기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태극기가 떼어져 사라졌다고 해도, 그것 역시 너무도 자연스러워 태극기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대부분 스쳐 흘러 보내고, 기억에 두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했다. 우리 아파트에 시추와 함께 살던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아침 시간 멍하니 커피를 마시다, 자연스럽게 떠올릴 만한 생각이었다.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잠시 머물다 사라질 생각.
《에세이문예》2019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