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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길가에 핀 들꽃입니다    
글쓴이 : 진연후    19-09-08 21:51    조회 : 5,524

나는 길가에 핀 들꽃입니다

진연후

나는 길가에 핀 들꽃입니다. 오대산 산행코스 중 하나인 노인봉 입구에 살지요. 이곳은 봄 여름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산길인데 엊그제부터 인적이 좀 뜸하네요. 며칠째 폭염주의보가 내려지고 오늘도 지역에 따라 폭염경보가 발령되었다니 계곡물도 없는 산을 찾는 발길이 끊어질 만도 하지요. 극기 훈련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 더위에 산에 오르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할 테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여유로움을 찾는 길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싶어요.

오전에 말없이 우리를 스치고 올라갔던 오십대로 보이는 부부가 내려올 때 쯤, 깜박 졸음이 올까하는데 인기척이 들립니다. 사십대로 보이는 두 여자입니다. 와! 짧은 감탄사가 이곳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만족으로 느껴지네요. 발길을 멈추더니 고개를 숙이고 세상 급할 일이 없는 듯 우리를 천천히 바라봅니다. 이곳이 처음이라는 여자가 나를 보고 웃습니다. 꽃잎이 자그마하니 들국화를 닮았네. 이름이 뭘까. 이 길이 생각나면 종종 온다는 친구가 내 이름을 ‘개미취’라고 알려줍니다.

나는 산이나 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국화과의 다년생 식물입니다. 푸른색이 도는 보랏빛의 작은 꽃잎을 가졌지요. 들녘에 무리지어 피어 있을 때 가장 돋보이는 들꽃입니다.

내 이름을 두어 번 읊조리던 처음 여자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립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해결해야 할 일이 없으니 편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바라보며 무리지어 있어도 요란하지 않고 어우러져 있음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이기고 지는 일도, 옳다 그르다 따질 일도 없으니 시끄러울 까닭이 없지요.

두 시간 반이 좀 더 흘렀을까. 그녀들이 내려옵니다.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표정치고는 꽤나 편안해 보입니다. 그녀들의 가벼운 웃음이 바람에 날립니다. 그 바람에 우리들도 함께 흔들립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녀들의 산행이 끝납니다. 처음 왔다는 여자가 모퉁이를 돌아가는 듯 하더니 다시 옵니다.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햇빛 쏟아지면 그대로 족하다 여기는, 길가에 핀 들꽃처럼 살 수 있을까. 그녀의 혼잣말이 다짐처럼 들립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올 때보다 가벼워 보입니다.

하루에 수백 명이 나를 스쳐가도 말 걸어주는 이가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겨우 서너 명이 지나가도 그 중 한 명이 오래 눈 맞추고 말을 걸어주기도 합니다. 나는 길가에 핀 들꽃입니다. 개미취라는 이름을 가진 들꽃이지요. 사람들은 나무든 꽃이든 이름을 지어놓고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를 어떻게 부르든 무엇으로 기억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예쁘다고 하든,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들꽃이니까요.

그녀는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할까요? 그것은 그녀의 몫이니 이제 그만 바람에게 세상 이야기나 들어야겠습니다.

 

시에.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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