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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추억    
글쓴이 : 윤기정    19-09-16 05:54    조회 : 781

파리의 추억 

윤 기 정 

들어왔던 문의 유리에 겨우 붙었습니다. 더 달아날 곳은 없습니다. 피하지 못하면 한 차례의 가격으로도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리에서 전해오는 냉기보다 더 차가운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흐릅니다. 바람을 가르며 등으로 그것이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피하는 것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창 너머로 흰 구름 가득한 하늘이 끝 간 데 모르게 너릅니다. 저 하늘을 다시 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채가 다가옵니다. 북 치는 방망이는 북채, 골프공 치는 막대기는 골프채, 장구 치는 작대기는 장구채, 파리 때려잡는 채는 파리채입니다. 파리채는 그 그림자가 먼저 덮쳐 올 때가 더 무섭습니다.

천지신명께 하루만 더 파리 목숨을 허락해 주십사정성을 다해 앞발 모아서 기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파리채 소리 대신에 옆구리에 파리채가 닿았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채에 막혀서 발만 동동 구르며 문가로, 문가로 밀려났습니다.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살짝 날아 파리채에서 떨어지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인 방충망에 붙게 되었습니다. 방충망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기도가 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다시 파리채가 옆구리에 부드럽게 다가서더니 방충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날갯짓으로 밀려드는 바람을 가르며 문틈 사이를 빠져나갔습니다.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한낮의 온기 머금은 담에 붙어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남에게 손쉽게 죽임을 당할 만큼 보잘것없는 목숨을 오죽하면 파리 목숨이라 하겠습니까? 조금 전 일은 뜻밖이었습니다. 파리채를 쥔 영감의 눈에서 평소의 살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우리네 동족에게 빚진 일이 있을 리도 만무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과가 좋으니 좋은 일이고 어쩐지 파리 목숨이 대접을 받은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기적이 또 일어났습니다. 기적도 하품이나 기침처럼 전염성이 있나 봅니다. 영감 못지않게 손이 매운 마나님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체통에 어느 절에서 부친 편지 겉봉이 가끔 보이더니 불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야외 식탁에 음식이 차려진 날이었습니다. 손님이 많았습니다. 텃밭에서 갓 따 온 싱싱한 상추, 때깔 고운 집 간장, 구수한 냄새 풍기는 쌈장이며 입맛 돋우는 음식들이 풍성했습니다. 쌈장 종지에 내려앉아 눈치를 살폈습니다. 마나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언제라도 냅다 튈 준비를 했습니다. “어라. 웬일이죠?” 암팡지게 손을 오그린 포획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봄바람이라도 희롱하듯이 살랑살랑 손을 저어 쫓는 시늉만 하네요. 믿을 수 없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닙니다. 저렇게 무심한 듯 다가와서는 날쌔게 손으로 잡아채서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일을 당하고 다시 날아다니는 친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물방울 송송 맺힌 상추 이파리로 자리를 옮겨 어찌할지 떠보았습니다. 또 한 번 목숨을 걸고요. “어머. 웬일?”이란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손바람만 살랑살랑 일으키고 말았으니까요.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집에서는 새 부리에 쪼이거나 거미줄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목숨을 보장받았음을. “며느리가 ○○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부터는 모기 한 마리 죽이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데.” 영감 이야기를 들은 손님들의 표정이 환해지며 좌중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손바람에 쫓겨 자리를 옮기느라 미처 못들은 한마디가 궁금했습니다만 물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목숨 못지않게 목숨이 가벼운 모기에 대한 말로 미루어 보니 요즘 영감과 마나님 행동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평안한 가을겨울을 보내고 희망찬 새봄을 맞았습니다. 짧지만 평화로운 봄이 지나갔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잔디밭에 간이 풀(pool)이 놓이고 아침부터 물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영감은 힘든 줄도 모르는지 여러 차례 집안에서 더운물을 들통에 받아다가 풀에 부어서 찬물과 섞었습니다. 해가 중천일 때 눈부신 아이 하나가 풀장에서 물놀이했습니다. “어머니 모기가 많은가 봐요?” 아이의 뽀얀 팔뚝에 빨갛게 부르튼 자국을 쓰다듬으며 아이의 엄마가 물었습니다. “모기뿐이랴? 시골이라 파리도 많지.” 마나님이 답했습니다. 대화를 나눈 짧은 시간이 평화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다시 파리 목숨이 되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지난 일 년여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닮은 평화도 아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님 많던 날 깜박 놓친 한 마디 ○○의 정체도 알았습니다. 이제 평화는 끝났지만, 아이 때문에 평화스러웠던 지난 일 년이 어딥니까? 고마움에 아이의 눈부심을 인정하렵니다.

파리채가 나타났습니다. ‘.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변한 것도 달라진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무릇 생명 가벼운 것들은 기적도 고난도 주어지는 대로 받아야만 하는 건가요? 하지만 사람 아니 파리의 앞일을 누가 압니까? 며느리가 또 아기를 가져서 평화의 시절이 다시 올지.

한국산문201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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