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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밥통의 비밀    
글쓴이 : 김단영    19-09-17 16:02    조회 : 5,914

 빨간 밥통의 비밀


김단영


 추석 다음날에도 전기밥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아들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머니, 또 단술 해요?"

 "아니. 약밥 만든다. 어제 성묘 갔다가 주워온 알밤으로."

 조금 오래된 빨간색 전기밥통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꺼내서 감주(단술)를 만들곤 한다. 시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쓰시던 물건인데 이사 나오면서 챙겨온 것이다. 밥통의 기능은 단순했다. 버튼 하나로 보온과 취사만 선택이 가능하다. 밥을 안치면 찰기라곤 없이 푸석거리기 일쑤지만 감주를 만들기엔 그만한 것이 없다. 반면에 끼니때마다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성능이 좋은 전기압력밥솥을 사용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이 장착되어 있지만 '만능'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겨우 밥 끓이는 일만 시키고 있다.

 낡고 빛바랜 밥통에서 끓고 있는 것은 정말 간편하게 만드는 약밥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의약과 음식물은 같은 근원을 가진다는 의식동원(醫食同源)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약밥이 밥 중에 가장 약(藥)이 된다하여 약밥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신라의 옛 풍속으로 만들던 약밥은 번거로운 조리과정 때문에 서민들은 쉽게 해 먹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은 조리기구도 다양해지고, 조리방법도 간편해졌다.

 서너 시간 불린 찹쌀을 안치고 밤, 대추, 잣, 호박씨 등을 얹은 후에 흑설탕과 간장으로 간을 맞춘 밥물을 붓고 끓이면 완성이다. 시루에 여러 번 쪄내는 전통식에 비하면 정말 간편해졌다. 감주는 갓 결혼해서 시뉘형님께 배웠는데, 엿기름을 치대서 밤새 보온으로 삭힌 다음, 이른 새벽에 한소끔 끓여놓으면 완성이다. 다른 음식도 해가며 언제 이리 만들었느냐고 어머님이 짐짓 놀라는 표정을 보이시곤 하셨다. 기실 젊은 며느리의 음식 솜씨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열심히 만들어내는 정성을 예쁘게 봐주셨던 게다. 마을회관 노인정에 나가서 며느리 자랑을 하시는 바람에 감주나 부챔개를 몇 차례 해 나르기도 했다. 지금은 벗어났기에 고된 시집살이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결혼 후 5년 동안 따로 살다가 6년째 되던 해에 시댁으로 살림을 들였다. 신혼살림을 합쳐놓으니 냉장고도 두 개, 세탁기도 두 개, 전기밥통도 두 개였다. 어머님이 쓰시던 밥통은 기능이 단순하고 촌스러운 빨간색이었다. 주방이 좁은 건 아니었지만 어머님이 쓰시던 것을 치워놓고 내가 쓰던 전기압력밥솥 하나만 전기를 꽂아놓았다. 10인용 밥솥에는 항상 밥을 그득하게 해놓고 일을 다녔다. 이삼 일쯤 지났을 때였다. 퇴근해서 돌아오니 종일 밥을 못 먹었다며 기운 없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왜 안 드셨나 여쭈니 안 드신 것이 아니라 밥통 뚜껑을 못 열어서 종일 굶으셨던 거였다.

 압력 추를 붙들고 하루 종일 씨름했으나 끝내 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세가 많으시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어머님이 지금의 내 나이일 적에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고 지은 밥을, 양은 찬합에 넣어 따뜻한 아랫목에다 이불로 덮어두었다고 한다. 남편이 늦둥이 막내라서 어머님과 막내며느리인 나와는 48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 치워두었던 빨간 밥통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신제품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작동이 간단한 가전제품도 어머님에게는 다루기 힘겨울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하루는 눈이 어두운 어머님이 밥을 안치겠다며 쌀을 밥솥에 붓고 계셨다. 주방으로 들어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밥통 안에 있어야 할 내솥이 보이질 않았다. 어머님은 항상 내솥을 꺼내서 거기에 쌀을 씻었다. 얼마 전에 내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내솥에다 쌀을 바로 씻으면 코팅이 벗겨져요. 양재기에다 씻어서 밥솥에 안치는 게 좋아요!"

 바닥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은 까닭인지, 재질이 약한 건지 옛날 전기밥통은 내솥의 칠이 잘 벗겨지고 오래 사용하질 못했다. 어머님은 내솥을 빼놓고 씻은 쌀을 그냥 부어 버린 것이었다. 생쌀은 얼추 다 털어냈지만 밥통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다.

 어머님은 밥솥을 고장 내서 어떡하느냐며 걱정을 지나치게 많이 하셨다. 안심시켜드린다는 것이, 요즘은 서비스가 좋아서 공짜로 다 고쳐준다며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문제는 수리비용을 낸다 해도 전기밥통 수리받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유명메이커 제품이 아니라서 서비스센터 찾기도 힘들 뿐더러 전자회로 부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국 남편이랑 의논해서 새로 하나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신제품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어머님이 쓰시던 빨간 전기밥통과 비슷한 것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 발품을 팔아가며 최대한 비숫한 걸로 찾아냈다.

 새 전기밥통을 가져다 놓으니 어머님이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고치니까 새 것 같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고장 나도 쉽게 수리 받을 수 있는 제품으로 사자며 고른 것이 지금까지 사용하는 밥통이다. 그리고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니나갔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계란도 삶아 먹고, 청국장도 띄우고, 홍삼을 쪄내기도 했다. 식구들은 밥통이 부글부글 끓기만 하면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겠거니 기대를 했다. 엿기름을 주무르고, 찹쌀을 불리며, 주워온 밤을 두 시간째 깎고 있어도 빨간 밥통이 만들어내는 음식을 생각하면 힘든 줄을 모르겠다.

 뚜껑을 열면 대개는 감주가 들어 있지만, 가끔씩 약밥이 얼굴을 내밀면 식구들도 좋아해준다. 오늘도 밥통이 끓고 있으니 또 무슨 음식을 만들고 있나 아들이 궁금한 모양이다. 빨간 밥통은 매번 명절 때마다 불려나와 부글부글 끓여대곤 하지만 불평을 하거나 성질을 부리는 일이 없다. 그동안 이 아이는 한 번도 고장을 일으키지 않고 고분고분해서 고맙고 예쁘다. 내 나이 마흔에 어머님은 미수(米壽)의 일기를 마치셨다. 빨간 밥통을 꺼내 쓸때마다 자연스레 어머님 생각이 난다. 어머님은 가셨지만 대를 물려 쓰고 있는 물건이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산문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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