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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익은 맛    
글쓴이 : 나운택    19-11-16 03:19    조회 : 7,649

 

농익은 맛                                                   

                                                                                                                                      나구름

 

   “여자는 서른이 넘어야 농익은 맛이 난다.”

   오래전 고교 시절 어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성적인 호기심이 절정에 이르러 있는 까까머리 여드름쟁이들에게 하신 말씀치고는 꽤나 자극적이었다.  ‘농익다’라는 말은 ‘과실 따위가 흐무러지도록 푹 익다.’라는 뜻과 함께 ‘여인의 몸이 매우 성숙하여 농염하게 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들 설익은 머슴애들의 상상력을 한 껏 자극하고도 남았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으로 고발당할 수도 있는 얘기지만, 한창 에너지가 폭발하는 나이에 공부에 찌들어 있는 우리들이 보기 딱해서 기말시험이 막 끝났을 때쯤 우리들 기분을 풀어주시려고 성교육 비슷한 얘기를 하시던 중에 툭 던지신 말이었던 것 같다.

 

   농익었다는 말은 대충 적당한 정도로 익은 단계를 지나 아주 한껏 익은 절정의 상태임을 뜻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그 맛이 상해 버릴 수도 있는 마지막 단계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내가 어릴 때 시골에서는 참외와 수박 같은 과일을 요즘처럼 비닐 온상 같은 인공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그냥 제철에 밭에서 길렀다. 참외들이 어느 정도 익어서 내다 팔 때 유통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밭에서는 아직 설익은 것들을 따서 내보냈다. 그런데, 시골 사람들은 그렇게 설익은 과일을 먹는 법이 없다. 늘 너무 익어서 어쩔 수 없이 따서 버려야 하는 단계에 거의 이른 것들을 골라서 따 먹는다. 사과 같은 과일도 나무에서 떨어진 것들을 주로 먹는다. 이런 과일들은 시장성은 없지만, 그 맛은 아주 진하게 농익은 맛이 난다. 그 과일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맛을 즐기는 셈이다. 요즘 우리가 시장에서 사 먹는 과일들에서는 도저히 그런 진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다. 대부분의 과일들을 설익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익기 시작도 하지 않은 시퍼런 단계에서 수확하여 시장으로 내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과일의 깊은 맛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원래의 제대로 된 맛이 어떤 건지도 알 길이 없다.

 

      식품점에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을 보면 대체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잘 익어 보여서 어느 게 너무 일찍 수확한 건지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중에서 바나나를 보면 아직 익기 시작도 하지 않은 완전히 시퍼런 것들이 진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일찍 수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퍼런 바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보기 좋게 노란 빛을 띨 때까지는 진열대에 그대로 있지만, 껍질에 검은 점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면 진열대의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 헐값에 팔리거나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실 바나나를 먹어보면 전체가 노랗고 싱싱해 보이는 것보다는 검은 점들이 좀 박힌 것들이 보기와는 달리 더 달고 깊은 맛이 난다. 

 

   일본인 의사 쓰루미 다카후미(鶴見隆史)가 쓴 <하루 한 개, 검은 바나나>에 의하면, 바나나는 노랗게 빛깔이 좋을 때보다 검은 반점이 숭숭한 때가 맛도 더 달콤하게 좋을 뿐 아니라 실제로 소화와 대사를 촉진하는 효소와 항산화 물질이 훨씬 더 풍부하다고 한다. 일본 테이쿄대학 약학과 야마자키 마사토시(山崎雅稔)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선명한 황색을 하고 있는 숙성 4일째에는 면역효과가 일단 감소했다가 검은 반점이 증가한 10일째에 그 효과가 최고에 달해 면역증강 효과가 무려 8배에 이른다고 한다.            

                                                                                                   

   누군가 사람이 나이를 먹는 건 단순히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육체적으로는 세월을 따라 세포가 노화되어 늙어 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점점 더 생각이 깊어지고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는 얘기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이리라. 같은 나무에 열린 과일이 시간이 흐른다고 전부 잘 익어가는 게 아니듯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꼰대’로 늙어가는 사람도 있고 원숙한 ‘원로’로 익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무에 달린 과일이 곱게 익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볕을 쪼이고 뿌리로부터 부지런히 영양을 빨아먹어야 하듯 사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냥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익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인격을 수양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농익은 맛을 모르는 건 비단 과일뿐만이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턴지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사라졌다. 직장에서는 그 분야에서 지식과 경험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인 40대 후반이나 50대가 되면 쫓겨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예전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어렵고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고 균형추 역할을 해주곤 하던 ‘원로’들이 없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진 게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되었다. 익기도 전에 너무 일찍 나무에서 따낸 과일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그 과일의 농익은 맛을 알지도 못 하고, 그 맛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듯이 이제 사람들은 어른을 찾지 않게 되었다. 식품점 진열대에서 거뭇거뭇한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는 바나나들을 모아서 헐값에 팔아치우거나 아예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듯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그저 쓸모없이 걸기적거리는 ‘퇴물’이나 ‘꼰대’로 취급받을 뿐이다. 어쩌다 원로들을 모셔다가 의견을 듣는다고 할 때도 그저 형식적으로 그렇게 할 뿐 그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원로들의 피부에 내려앉은 거뭇거뭇한 검버섯만 볼 뿐 그들이 속에 간직한 지혜의 농익은 맛을 알지 못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지 못 하면 그저 ‘늙은이’가 되어갈 뿐 결코 품위와 지혜를 갖춘 ‘어른’이 될 수 없고, 어른들의 농익은 지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는 설익은 과일처럼 겉모습만 싱싱할 뿐 결코 농익은 과일같은 향기를 지닌 성숙된 사회가 될 수 없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희끗희끗 머리에 서리가 내린 거울속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고등학교 시절 그 선생님이 불쑥 던졌던 말이 떠올라 거울 속 나에게 시비걸듯, 다짐하듯 혼자 중얼거려본다. “ 남자는 쉰이 넘으면 농익은 맛이 나야 한다. ”  (리더스 에세이 2019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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