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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 파자마 증발 사건    
글쓴이 : 홍정현    20-01-04 12:19    조회 : 5,685

핑크 파자마 증발 사건

홍정현

 

십 년 전쯤, 아끼던 파자마가 감쪽같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핑크 파자마 바지였다.

집에서 입는 홈웨어는 무조건 편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홈웨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다 운 좋게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사게 되면, 계속 그것만 입게 된다. 그 파자마가 그랬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에, 조이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탄성을 가진 허리 고무줄, 반찬을 떨어뜨려 얼룩이 생겨도 티가 나지 않는 핫핑크 색에, 기분을 발랄하게 해주는 잔잔한 하트 무늬까지, 내겐 완벽한 파자마였다. 완벽했기에 자주 입었고, 입을수록 파자마는 내 체형에 맞게 늘어나 더 편한 옷이 되었다.

같은 동네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날 저녁에 파자마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며칠 동안 집안 곳곳을 찾아봤지만 소용없었다. 파자마가 사라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겨우 낡은 파자마가 없어진 것뿐인데, 묘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파자마를 입고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거나 책을 읽을 시간이 되면, 파자마의 부재가 떠올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사라진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 더 나를 집요하게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파자마가 증발해 없어진 건지 궁금했다.

혹시나 해서 가족들을 심문했다. 당시 ‘워킹맘’인 나를 대신해 살림을 맡고 있던 친정어머니는 이사하기 전 파자마가 다른 옷들과 함께 서랍에 얌전히 개어 있었던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셨다. 그리고 꼼꼼하지 못한 딸을 의심하시며, 나보다 더 치밀하게 파자마 수색을 시작하셨지만, 결국 실패하셨다. 파자마는 이 집에서 확실하게 없는 것이니 이제 그만 잊으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여러 가설을 세우며 추리했다. 그러다, 어쩌면 남편이 나 몰래 파자마를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에 나는 남편 옷을 몰래 버린 적이 있었다. 산 지 십수 년이 지나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러운 남편의 체크무늬 재킷. 옷장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옷이 못마땅하여 남편에게 묻지도 않고 의류 재활용함에 가져다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남편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하트 무늬 핫핑크 파자마를 입고 한껏 귀여운 척 활보하는 내 모습이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파자마에 관해 물었다.

“응? 뭐? 그게 뭐야? 그런 파자마가 있었어?”

그는 핫핑크 파자마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 부인의 외모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와도 남편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직장의 남자 동료는 바로 알아보고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네요, 라는 인사말을 건넸었는데….

파자마의 분실과 가족은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누가 훔쳐 갔을까? 왜 훔쳐 갔을까? 그 파자마는 나에게만 매력 넘치는 옷이지 다른 사람의 눈엔 그저 낡고 축 늘어진 파자마일 뿐인데. 누가 탐을 내고 가져갈 옷은 절대 아니었다. 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이사 직후 사라졌으니 이사하는 과정에서 없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이사업체 직원이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다는 말이다.

 

평소 사소한 일까지 무당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영적인 세계에 심취한 이사업체 직원 모 씨는 최근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 여자아이 귀신이 나와 모 씨를 괴롭혔다. 모 씨는 단골무당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했다. 무당은 그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은 이사 가는 집에서 핑크색 물건을 훔쳐 태우면 된다고 했다. 모 씨는 자신의 직업윤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라는 무당의 말에 잠시 갈등했지만, 오랜 불면으로 누적된 육체적 피로로 인하여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당장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심정이었기에 무당의 말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 우리 집이 이사하는 날을 바로 ‘그날’로 정하고, 이삿짐을 포장하며 조심스럽게 핑크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린 딸이 있는 집이라면 핑크 색이 흔할 텐데, 우리 집엔 아들 하나뿐이라 핑크가 귀했다. 그러다 침실 옷장에서 핑크 파자마를 발견했다. 비싸 보이지 않는 파자마였다. 거기에다 그것은 꽤 낡은 상태라 없어져도 주인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라면 자신의 양심에 크게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는 핑크 파자마를 점퍼 안에 숨겼다.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의 추리는 개연성이 높은 곳에서 떼굴떼굴 굴러 내려와, 개연성의 바닥을 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다 보니 이상한 이야기까지 떠올랐다. 집에서만 입는 옷이 갑자기 증발한 것은 사소한 사건이라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을 설명하는 데엔 이상한 이야기가 적당하지 않을까?

귀여운 하트 무늬의 핑크 파자마, 거기에 생긴 보풀과 체형을 따라 늘어진 천은 내 고단한 일상의 흔적이었다. 그 파자마를 입은 채, 아이를 재우고 소파에 누워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에너지를 충전했다. 핑크 파자마는 내 휴식을 완성해 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파자마의 행방이 궁금하다. 파자마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누가 가져갔을까? 그때 파자마가 사라진 일은 내 인생의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은, 종종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미스터리한 부재, 귀신이 곡할 노릇.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든다.

 

 

 

《한국수필》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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