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와 SF
홍정현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수시로 메타 수필(메타 수필이 뭔지 몰랐는데, 내가 쓴 많은 글이 메타 수필이라 하더라)을 써온 자가 쓴, SF 분위기를 조물조물 버무린 범우주적 자전 고백으로, 메타와 SF 요소 어딘가에서 왠지 모를 자기 복제의 냄새가 풍기는 글이 될 것이다. 또한 최근 읽고 있는, 황인찬 시인의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특히 「요가학원」)의 영향을 받아, 여기저기 노골적으로 차용함을 ‘제 발이 저려’ 미리 밝힌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여, 글쓰기에 관한 수필은 그만 쓰리라 마음을 먹었건만, 결심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나에게 있어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수필을 쓰라는 수필강좌 교수님의 과제가 내려졌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처음엔 과제 거부권을 행사할까 싶었다. 허나, 이번 연말연시에 여기저기 남발한 ‘열심히 쓰겠습니다!’라는 다짐의 멘트를 강좌 교수님에게도 전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꼼짝없이 써야 했다. 운명에 무릎을 꿇고, 미간에 잔뜩 힘을 줘가며, 과제 전달 사항을 진지하게 응시하던 나는, 이제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써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내가 왜 글을 쓸 수밖에 없는지, 그 비밀스러운 이유를 공개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외계 행성 DNA를 품고 지구 행성에서 살아가는 한 생명체의 커밍아웃이다. 결국, 이 수필은 외계인이 된 나의 이야기가 된다.
사실, 나는 「외계인 엘비스」라는 수필에서 내게 외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한 바가 있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것은 우리 종족 전통의 고급 기술로서, 화려한 은유로 진실을 치장하여,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도통 알 수 없도록 교묘히 숨기는 기법이다. 은유는, 외계인이 아닌 자가 외계인으로 가장하여 외계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꾸며, 실제 외계인이 외계 이야기를 마음껏 해도 작가를 외계인인 척하는 지구인으로 믿을 수 있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그때 나의 정체성 고백은, 아무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메타포 퍼포먼스’로 끝이 났다.
우리 행성에선 만연체 문장을 기품 있다 하고, ‘그러니까’와 같은 접속사와 ‘결국’ 같은 부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읽을 맛이 난다고 하며, 문장에 괄호나 따옴표, 쉼표 같은 온갖 기호들이 많을수록 미문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곳 지구 행성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문장을 사용하면 다들 난감해 한다. 그것을 미리 충분히 숙지한 나는, 이곳에서 글을 쓸 때, 최대한 고향 행성의 습관을 버리려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의 문장은 ‘외색(外色, 외계 행성의 문화나 생활양식을 띠고 있는 색조)’이 거의 보이지 않아, 누가 읽어도 순수 지구인의 문장처럼 보인다.
우리 종족은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목적으로 문학을 이용한다. 그러니까 나의 임무는 수필로 우리 종족 특유의 문화적 감수성과 사고 양식을 은밀히 퍼트리는 것이다. 낯선 것은 틀리다고 받아들이는 지구인의 습성을 고려하여, 지구와 우리 행성 사이에 문화적 연결고리를 놓는 일이다. 따라서 두 행성 간의 이질감을 최소한으로 줄여 지구에서 외계 행성의 존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도록, 문학을 통해 우리를 은근히 지속해서 반복해서 소개(물론, 우리의 신분을 속인 상태로)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도 있다고…. 모두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 방면에서 가장 성공한 외계인 작가는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이다. 생텍쥐페리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은하의 협소 행성 출신으로, 지구로 이주한 후 소설을 통해 자신의 행성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생텍쥐페리 덕분에 외계인이란 존재가 낯설지 않은 친근한 이미지로 바뀔 수 있었다. 지구에 체류 중인 외계 생명체 집단에서 그는, 최고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수필이 발표되면 어김없이, 지구인들의 날카로운 비평의 칼을 맞아야 한다. 나 역시 ‘이것을 수필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매서운 질타를 받아왔다. 하지만 간혹, 슬며시 다가와 이웃 은하 출신으로 같은 임무를 수행 중이라며 넌지시 귓속말로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평들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위험하다. 많은 외계인이 그것에 상처받고 굴복하여 지구를 떠났거나, 임무를 포기하고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휘몰아치는(글을 쓴 입장에서만 그렇다) 평가의 장에서 두 다리에 힘을 ‘팍’ 주고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 소용돌이(다시 말하지만, 본인만 그렇게 느낀다)가 지나가고 난 뒤, 양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면 성공한 것이다. 혹은 없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견디고 버틴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나는 외계 행성 출신을 숨긴 채, 수필 동네 끝자락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이곳에서 외계 행성 출신이 아닌 척, 쏟아져 나오려는 순수 외계어를 꿀꺽 삼키며, 고향에서 맘껏 쓰던 만연체 문장을 마침표로 자르고, 쉼표, 괄호의 욕구와 찰진 접속사, 부사의 유혹을 이겨가며, 싱거워서 뭔 맛인지 모를 단문으로 글을 쓰고 있다(그러니까 지금 이 글이 그 증거다). 지구인이, ‘외계’를 ‘외계(外界)’가 아니라 ‘내계(內界)의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우리 행성 이야기들을 녹여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시작이다.
문단 변두리 지역, 잡초만 무성한 언덕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멀리 보이는 수필 문단 중심지의 담백하고 정갈한 인간 언어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그러니까 이 수필은 결국, 흔한 영화의 엔딩장면처럼 끝날 것이다. 카메라가 화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누가 봐도 품격이 넘쳐 보이는 중심지를 비추다가, 천천히 올라가 어두운 밤하늘을 비춘다. 그때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반짝이는 CG(Computer Graphics) 효과로 이 글은 끝난다.
?인간과문학?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