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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라도 바람에    
글쓴이 : 윤기정    20-04-15 22:04    조회 : 5,131

누구라도 바람에

윤기정

바람 한 줄기에 낙엽을 태우던 불길이 주저앉는다. 부지깽이로 낙엽 더미 아래에 바람 길을 터주자 불길이 다시 인다. 이내 불길이 잦아들고 윤기 없는 백색 재만 바람에 날린다. 지난가을 마당가에 모아두었던 묵은 낙엽이 사라졌다.

바람의 심사는 꺼져가는 불길을 살려내려는 열망일까? 끝내는 재나 날릴 절망일까? 열망과 절망 사이 어디쯤 윤동주와 서정주의 바람이 보인다. 윤동주는 바람에 부끄러웠고, 서정주는 바람으로 컸단다. 동주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주어진 길을 운명처럼 걸어서 맑은 영혼으로 우리들 가슴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미당은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읊었다. 어떤 이에게 역풍이지만 어떤 이에겐 미풍일 수도 있는 역설로 바람은 미당의 시혼(詩魂)을 키웠나 보다.

바람이 일면 모든 경계는 긴장한다. 봄바람이 불면 대지에는 물기가 돌고 얼음은 풀려 강기슭의 나룻배는 알지 못할 설렘으로 출렁댄다. 돛이 부푼 돛배는 출항을 꿈꾼다. 갈매기는 바쁜 날갯짓으로 바람을 딛고 서서 수평선을 응시한다. 꽃망울은 터뜨릴 순간을 가늠하고 나무는 가지마다 눈을 틔워 세상을 내다본다. 민들레는 비상을 기다리는 씨를 키우고 풍경(風磬)은 소리 내어 존재를 알린다. 새들이 먼저 알고 목청을 가다듬는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안과 밖이 깨어난다. 어디 봄바람뿐이랴? 어느 바람에나 존재하는 것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나의 시간 속으로도 바람은 지나갔다. 따뜻한 바람도 있었고 매서운 바람도 있었다. 가장 깊은 기억의 바닥에는 간지럽고 따뜻한 바람이 자리하고 있다. 까진 무릎에 빨간 약을 발라주면서 호호 불어주던 엄마의 입김,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을 호호 식혀주던 엄마의 입 바람, 티끌 들어가면 엄지와 검지로 아래위 눈꺼풀을 까뒤집고 불어주던 엄마의 바람은 생각만 해도 간지럽다. 떠올리기만 해도 따스함이 가슴에 괸다. 매서운 바람도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들이닥친 가난이었다. 차디찬 바람이었고 그 바람에 일찍 철들었다.

어린 나이에 철듦은 바람 앞에서 셈부터 따지게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바란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 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잎사귀나 흔들 수밖에 없는 것들의 소리에 귀 닫지 말아야 했다. 의식의 밑바닥에 숨죽였던 바람이 두꺼운 기억을 뚫고 올라와서야 따뜻한 바람도 있음을 생각해냈다. 나를 채운 것은 차가운 바람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바람이 먼저 배어 있음을 기억해냈다.

따뜻한 바람을 기억하자 바람이 내게로 들어왔다. 바람과 하나 되어 풀잎 쓰다듬고, 나뭇잎을 흔들고 강물을 디디고 산을 오르다가 바다 깊숙이 곤두박질한다. 바닥을 쳐서 펄을 뒤집고 회색의 물방울을 끌고 솟아오른다. 파도를 박차고 단박에 하늘까지 치솟는다. 구름을 끌다가 갈대밭에 내려앉아 숨을 고른다. 바람을 털어내며 바람을 생각한다.

바람은 기압 차이에 따라서 산들바람 같은 미풍부터 바다를 뒤집어 해일을 일으키기도 하는 태풍까지 양태가 변화무쌍하다. 구름을 몰아서 비를 내리기도 하고 비나 눈과 합쳐져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바람 앞의 촛불’, ‘치맛바람’, ‘투기 열풍처럼 의미가 확장되어 인간사를 에둘러 표현하는데 예부터 바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람을 불러들였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큰 시인들의 바람을 떠올린 것도, 산과 강과 바다를 바람처럼 누비다 갈 숲에 내려앉은 상념도 바람 탓이었나 보다. 바람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처마 끝의 풍경이 어찌 소리를 만들며, 갈대는 어이 흔들릴 것인가? 구름은 어찌 흐르며 물결과 파도는 어이 일까? 민들레는 어찌 새끼를 퍼뜨릴까? 시인이 생겨나기나 할까? 바람결에 흔들려야 할 것들이 흔들리고 생겨나야 할 것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내음이 거기 있다. 바람에 흔들린 만큼 아름다운 세상이다.

봄바람이 강물을 딛고 앞질러 달려간다. 바람 떠난 자리를 나비의 날갯짓처럼 한 박자씩 쉬어가며 동남풍이 채운다. 봄의 손목을 잡고 오느라 걸음이 더딘가 보다. 바람이 계절을 열고 또 바람을 부른다. 어디에나 바람은 불고 누구라도 바람에 젖는다.(양평문학 22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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